기자의 언어
2019년 09월 30일(월) 11:29 |
지난 24일 산수문화마당에서 동구 인문강좌가 열렸다. 김예원 장애인 인권 전문 변호사가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사는 법'을 주제로 의미있는 강연을 했다.
한 시간 남짓한 강연 동안 여러 번 충격에 빠졌다. 사회적 소수자들 앞에 놓인 벽의 두께에, 그 벽이 혐오라는 벽돌로 층층이 쌓여 쉽게 허물어지지 못할 것 같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인권 감수성이 이렇게 무뎠던가' 하는 자괴감이 크게 다가왔다.
이날 김예원 변호사는 '공감'을 강조했고, 그 시작은 '차별의 언어' 사용을 지양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은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고 사회에서 배제시킨다는 점에서 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차별의 언어는 '혐오'의 뿌리나 다름없다.
강연을 들으면서 그 동안 썼던 기사에 차별의 언어가 담겨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표현 하나하나가 누군가를 공격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이 급하다는 이유로, 혹은 부실한 취재로 깊은 고민 없이 쓴 기사의 무게를 실감했다. 문화부에 짧게 몸담던 시절, 나름대로 언어에 대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멋드러진 표현을 위한 것이었지, 누군가를 배려하는 언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장 폴 사르트르는 가장 낮은 사람의 눈으로 봐야 그 사회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애,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은 법과 사회의 성긴 테두리 안에서 규정되고 낙인 찍히는 경우가 많다. 기자는 법망에 갇혀 잘잘못을 헤아리는 데 멈춰선 안된다. 약자의 관점으로, 혹시 그 법망이 잘못 설정돼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진 않은지 살피는 게 기자의 의무다.
사건의 현장에 서게 된 지금, '발로 쓰는 언어', '몸으로 쓰는 언어'에 대해 고민하려 한다. 한 템포 쉬어 가더라도 기자의 언어를 구사하고 싶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