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노년계획을 세우다
유순남 수필가
2019년 09월 22일(일) 14:27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빠는 무계획이 계획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배우 송강호가 아들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인생은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로 읽힌다.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말일 것이다. 자기 능력이 계획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고, 주변 여건 때문에 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계획 없이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노년계획은 미리 세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계획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건강이 너무 좋아서 상식대로 살기가 억울할 때를 위해서다.

올 봄. 백세를 맞이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행복론'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들었고, 시인 윤동주와 동문수학 했으며, 정진석추기경을 제자로 둘만큼 많은 시대를 거쳤다. 2016년 김교수가 〈백년을 살아보니〉를 출간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65세에서 75세였다고 할 때, 필자는'설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수긍이 간다. 그 나이에는 발목을 잡던 자녀들이 대부분 직장을 구하여 자기인생을 살기위해 떠난다. 때문에 건강만 허락한다면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취미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또 심신이 여유로워서 새싹이 자라는 모습, 무위자적 노니는 구름, 바람에 몸을 맡기는 물결의 유희 등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어 행복하다.

그는 "여든 살이 될 때 좀 쉬어 봤는데, 노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한다. 필자도 아직은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런데 지나친 건강함과 일에 대한 사랑은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몇 달 전 서강대 모 교수가 서울시에 거주하는 대학생을 상대로 "부모가 언제쯤 죽으면 가장 적절할 것 같은가?" 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63세'라고 답한 학생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퇴직금을 남겨놓고 사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라니…. 최근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필자의 한 친구는 올해만 해외여행을 네 번이나 다녀왔다. 어느 날 친구아들이 "엄마, 해외여행 좀 그만 다니세요! 국내에도 좋은 데 많드만!" 여기까지는 들을만하다. 그런데 그 뒷말이 압권이었다. "내 돈, 다 써부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노년활동은 그칠 때를 미리 정해 꼭 지키는 것이 좋겠다. 지난여름 필자의 대종회 광주전남지부에서는 올 하반기 선조들의 유적지 탐방계획을 짜서 SNS에 안내문을 올리고 참가신청을 받았다. '첫째 날은 장성 송계서원, 순천 월계서원, 여수 유적지 탐방, 유가(劉家) 선조들이 처음으로 입도한 신안비금도 명사십리해변 낙조감상, 둘째 날은 비금도입도기념비와 선조의 묘역 참배, 그림산 등산, 하트해변 물놀이, 염전체험, 이세돌기념관 관람, 도초도 시목해변에서 민어회까지 맛볼 수 있다.'는 안내문에 신청자가 폭주했다.

95세 된 종친이 필자에게 전화해서 신청 의사를 밝혔다. 회장님은 "폭염에 연세도 많은 분을 모시고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든 일정이 틀어지게 된다."며 난감해했다. 그 종친은 "작년에 중국 유방(劉邦)문화제에도 참석했고, 올봄에 청산도에 갔다 왔어도 아무 문제없었는데, 왜 그러느냐?"며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다. 마음이 애틋했다. 그분은 지금도 여행하기에 충분히 건강하다. 하지만 95세라는 객관적 조건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 필자도 노년계획을 세웠다. 지금 생각으로는 문학공부를 좀 더 깊이하고 싶고,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도 더 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계획들은 계획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운전면허증을 반납할 나이, 단체 활동에서 은퇴할 나이 등 지키지 않으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계획은 꼭 실천하려고 마음먹는다. 그 나이기 되어서 변심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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