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 영화 <마농의 샘>
2018년 12월 20일(목) 17:04
마농의샘 포스터.
최근 상영 중인 우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나오는데 아이가 묻는다."아빠, 김혜수하고 유아인 중에 누구의 선택이 옳았던 거야?"잠시 당황하며 정의, 진실 등 틀에 박힌 대답으로 얼버무렸지만, 밀려드는 상념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97년의 이른바 '국가부도사태'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에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인 한시현(김혜수 분)은 국가적 위기상황을 감지하고 윗선에 보고한다. 이는 경제수석을 거쳐 청와대까지 올라가지만 묵살된다.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은 오히려 이 재난을 정부가 막을 수 없으니 국민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요구한다. 사업 실패와 생계 문제로 비관한 이들의 자살이 이어지고 선량한 피해자들이 속출하지만 국가는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 영화 속 재정국이 IMF협상을 강행하려 하자 한시현과 한은 직원들은 국가 차원의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과 일본 정부와의 통화 스와프를 제안하지만 이마저 묵살된다. 백화점에 물건을 공급하던 소규모 사업주 갑수(허준호 분)는 버티다 못해 약속어음을 돌려버리고 협력업체 사장은 자살한다.국가적 재난상황을 감지한 종금사 직원 윤정학(유아인 분)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다. 환율의 급등을 예상해 달러를 사 모으고 헐값에 쏟아진 부동산을 사들여 엄청난 투자 수익을 얻는다. 국가적 위기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보려 애쓰지만 결국은 실패한 한은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일했지만 모든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던 중소기업 사장 한갑수, 이러한 재난을 역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신분상승을 시도한 종금사 직원 윤정학,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미래세대에게 우리는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플로레트의 쟝 (Jean De Florette)

클로드 베리 감독의 영화 '마농의 샘'은 '플로레트의 쟝'과 '마농의 샘' 두 편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의 배경은 마르세이유에서 가까운 남 프랑스 산악지대의 조그만 마을이다.1편인 '플로레트의 쟝' 속 위골랭(다니엘 오떼유 분)은 군복무를 마친 후 시골 마을에 사는 빠뻬 스베랑(이브 몽땅 분)을 찾아와 정착한다. 위골랭은 삼촌인 빠뻬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다. 그는 카네이션을 재배해 큰돈을 벌 계획을 세우고, 삼촌 역시 조카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한다. 카네이션 재배에 많은 물이 필요한 두 사람은 샘이 있는 이웃 노인의 땅을 사들이려 하지만 거절당하고, 이 과정에서 벌어진 실랑이 중에 실수로 노인을 죽이고 만다. 당황한 그들은 시신을 방치한 채 도주하고 사건은 결국 노인의 실족사로 처리된다. 노인이 남긴 땅은 누이 플로레트의 아들인 쟝(제라르 드빠르듀 분)에게 상속된다. 플로레트는 결혼 이후 클리스뱅이라는 인근 마을에 정착했지만 남편이 죽은 후 비참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고 아들인 쟝은 꼽추였다. 세무공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아내와 어린 딸 마농을 데리고 이 마을에 정착하려 하고, 그의 땅을 탐내던 빠뻬와 위골랭은 지하수의 원천인 샘을 몰래 시멘트로 막아 버린다.

쟝은 농사를 짓고 토끼를 키우며 농촌에 정착하기 위해 애쓰지만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 산 너머에서 밀려드는 비구름을 바라보며 기뻐하던 장은 마을에 이르러 갑자기 멈춰 버린 빗줄기에 울부짖는다. 결국 그는 우물을 파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암벽을 폭파시키다 사고로 목숨을 잃고, 어린 딸 마농의 절규를 뒤로 한 채 땅은 빠뻬와 위골랭에게 넘어간다. 그들은 시멘트로 막아 놓았던 샘의 물구멍을 다시 연 이후 카네이션 농사를 통해 큰돈을 번다.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은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이다. 서곡에서 흘러나오는 플루트와 오보에의 아름답고 처연한 선율을 영화 속 쟝이 하모니카로 연주한다. 오페라 가수였던 아내가 여기에 맞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어린 딸 마농이 행복하게 바라본다. 플로레트의 아들 쟝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의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꿨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 위로 흐르는 애달픈 선율이 슬픈 운명을 예감케 하며 가슴을 저민다.

운명의 수레바퀴

종편의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주목받던 래퍼 마이크로닷이 잠적 논란에 휩싸여 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과거 자신의 고향에서 상당한 규모의 목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사태로 자금의 압박을 받게 되자 마을의 지인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린 후 잠적했다. 그의 두 아들은 장성한 후 연예인으로서 승승장구 중이었고, 당시의 채권자들은 TV에 출연한 이들의 과거를 알게 된다. 큰 빚을 지고 뉴질랜드로 이주한 이들의 가족은 한식레스토랑 등의 사업으로 꽤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던 이들의 아버지에게는 현재 인터폴의 적색수배령이 내려져 있고, 두 아들 역시 살던 집마저 처분한 채 잠적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배우 유아인이 연기한 종금사 직원은 자신의 국가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배우 김혜수가 연기한 한은 정책팀장은 파국만은 막아보려 애쓰지만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마이크로닷의 아버지 역시 자신이 살던 마을에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 망하게 된 이상 함께 죽을 수는 없다고 믿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라도 살아서 가족을 건사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확신했을 테고, 실제로 해외에서 정착한 이후 사업에도 성공하며 자식들 역시 번듯하게 키워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속 종금사 직원처럼 실제로 국가적 위기 상황을 투자 기회로 활용한 사례는 드물지 않았다. 당시의 중앙종금 대표, 투자증권 회장 등은 자산 가격이 급락한 사업체를 인수하거나 부동산 등 투자 자산을 사들여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하지만 이들에 대한 운명의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가조작으로 분식회계를 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풀려나거나 역외탈세 혐의로 세무조사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한 투자증권사의 전(前)회장은 현재 횡령 배임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

영화 '마농의 샘' 2편에서, 쟝이 죽은 후 아내는 빠뻬와 위골랭에게 땅을 팔고 도시로 떠나지만 어린 딸 마농은 홀로 마을에 남아 양치기로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마농(엠마뉴엘 베아르 분)은 이제 열여덟 살 처녀가 되었다.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마농의 모습을 보게 된 노총각 위골랭은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마농은 과거에 위골랭이 자신의 삼촌과 짜고 샘을 막았고 그로 인해 아빠인 쟝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마을 사람들이 쟝이 외지인이었기에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음을 알고 절규한다. 그리고 마농은 복수를 결심한다.산 속에서 우연히 샘의 원천을 발견한 마농은 위골랭과 빠뻬가 했던 것처럼 마을로 통하는 물길을 막아버린다. 갑자기 샘이 말라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고 시장을 중심으로 대책을 강구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힘겹게 물을 길어다 쓰며 근근이 버티던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다. 우리 중 누군가 죄 지은 자가 있어 물이 말랐으니 회개하라는 신부의 설교에 사람들은 크게 동요한다. 빠뻬와 위골랭이 지은 죄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수군대고 이 자리에서 마농은 두 사람의 죄를 낱낱이 폭로한다. 그러던 중에도 마농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며 구애하는 위골랭은 망신만 당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마농은 샘의 원천을 다시 뚫어 물이 흐르도록 한 후 마을의 교사인 연인 베르나르와 결혼식을 올린다. 하객으로 참석한 플로레트의 오랜 친구 델핀느는 유일한 혈육을 잃고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빠뻬에게 놀라운 사실을 들려준다.쟝의 어머니이며 마농의 할머니인 플로레트와 빠뻬는 젊은 시절 서로 사랑하던 연인이었다. 빠뻬가 군대에 징집되어 아프리카 전선으로 떠난 후 플로레트는 그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렸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전선의 상황으로 인해 편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한 플로레트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빠뻬를 증오한 플로레트는 대장장이와 결혼해 마을을 떠났다. 아이 역시 지우려 했지만 실패한 후 꼽추인 아들 쟝을 낳았다.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쟝이 실은 자신의 아들이었음을 알게 된 빠뻬에게 더 이상 삶을 지탱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유서에서 손녀인 마농에게 전 재산을 남긴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적었다."나는 네 아버지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다만 그의 슬픔만 보았다.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으나 나무에게마저 부끄럽다.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지옥마저도 과분하다. 잘 있거라, 내 손녀야."숨을 거둔 빠뻬의 손에는 남몰래 간직했던 플로레트의 머리핀이 쥐어져 있다. 그 위로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의 서글픈 선율이 다시 흐른다.

"누군들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아무리 내 의지대로 살았다 하더라도 이 또한 주어진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 있었음인 것을."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