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에 선 봉선화야
<주필>
여순사건 당시 유명 소프라노 오경심
즉결처분 전 ‘울 밑에 선 봉선화’ 불러
전설처럼 전해지고 향토지에도 수록
2018년 10월 29일(월) 21:00
“울 밑에 선 봉선화야/네 모양이 처량하다/길고 긴 날 여름철에/아름답게 꽃필 적에/어여쁘신 아가씨들/너를 반겨 놀았도다.…”

소프라노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순천 법원 앞 광장에 울려 퍼졌다. 웅성거리던 군중들은 쥐죽은 듯 침묵했다. 여순사건 부역 혐의자로 잡혀 즉결처분을 앞둔 그녀가 마지막으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르겠다고 요청해 허락을 받은 것이다. 노래가 끝나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제강점기의 유명 여류 성악가 오경심은 그렇게 최후를 마쳤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1948년 10월의 순천은 무법천지였다. 좌익은 경찰과 우익 인사들을 처단했다. 토벌군 진압 후 경찰과 우익은 반란군 가담자와 협력자들을 색출해 총살했다. 반란군에 밥 한 덩이만 줘도 잡혀갔다. 그들의 손가락질 하나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지금도 순천 지역에는 그 당시에 서로 죽고 죽이던 살육의 현장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유명 소프라노 오경심이 부역 혐의로 사형 집행을 당하기 전에 군중들 앞에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른 이야기다. 이 사연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오늘날에는 역사가 되었다. 순천문화원이 1975년에 펴낸 ‘순천.승주 향토지’는 ‘오경심은 순천사범학교 음악 교사로서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녀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부역하여 구 법원 앞에서 사형집행을 하려고 할 때 봉선화 노래를 불러 유명하기도 하다.’라고 적고 있다. 순천.승주향토지편찬위원회가 1979년에 발간한 ‘순천.승주 향토지’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오경심(吳敬心.1914~?)은 평양 출신이다. 순천 매산학교를 거쳐 광주 수피아여중을 1932년에 졸업했다. 그 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공부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를 다녔다. 이때부터 그녀는 소프라노로 두각을 나타냈다. 동아일보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1935년 광주와 순천 등에서 ‘소프라노 천재 오경심 독창회’를 연다. 1938년 6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신인음악회’에도 참석해 이름을 알렸다. 서울의 한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근무하다 박만고(朴萬古)와 결혼한 그녀는 순천으로 내려와 순천사범학교 음악 교사가 된다.

오경심은 토벌군 진입 후 부역자 일제 검속 때 사회주의자 남편과 함께 검거됐다. ‘호남신문’ 1948년 11월 13일 자는 고등군법회의 판결 내용을 전하면서 오경심과 박만고 등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9명이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오경심 부부가 최소한 그 이전에 순천에서 사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오경심이 인민군 장교가 되어 순천에 나타났다는 기록(‘순천시사’-정치사회편.1997)도 있다. 그 이후의 행적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오경심이 즉결처분된 것으로 알고 있을까. 여수와 순천에서는 당시에 많은 사람이 반란군 부역 혐의를 받아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됐다.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오경심도 당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처형 직전에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불렀다는 것은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 윤색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오경심의 애절한 사연이 허무맹랑하게 가공된 것만은 아니다. 여순사건 당시 순천에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르고 처형된 성악가가 또 있다.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성악가 김생옥(金生鈺.1918-1948)과 광주 명문가 출신의 촉망 받는 여류 피아니스트 박순이의 결혼은 1944년 당시 지역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이들은 장차 유럽으로 유학을 갈 계획이었다. 김생옥은 해방 직후 목포고 음악 교사를 거쳐 1947년 순천여고(당시는 6년제 순천여중)로 전근을 간다. 김생옥은 광주 동방극장에서 갖기로 한 음악회를 제자들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무렵 여순사건이 발생하고, 순천에서 여제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급히 내려간다. 그 후 사건에 휘말린 30세의 김생옥은 10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순천 죽도봉 골짜기에서 총살을 당한다. 뒤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생옥은 총살 직전 “내가 성악가인데 죽기 전에 노래 한 곡 부르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고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불렀다. 노래 실력을 알아본 지휘관은 사형을 중지하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이를 죽이라는 신호로 오인한 부하들이 방아쇠를 당겨 그는 비명에 가고 말았다. 가족들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

남편의 사후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홀로 된 박순이(1921-1995)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광주 사직동에 충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들을 거둔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가면서 함께 갈 것을 권유했으나 따라가지 않았다. 목포에 공생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거둔 윤학자(일본명 다우치 치즈코)가 있었다면, 광주에는 박순이가 있었다. 광주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광주 100년’의 저자인 박선홍은 ‘박순이는 광주 시민상도 2번이나 거절하여 오른손이 한 일은 왼손이 모르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광주의 누님이었다.’고 썼다.

지난 20일 순천 팔마경기장에 있는 여순사건위령탑 앞에서는 여순사건 70돌을 맞아 순천 유족회 주최로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 위령제에는 김생옥의 순천여고 16세 제자가 86세의 백발 할머니가 되어 참석해 울먹이면서 스승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증언했다. 당시 4살로 지금은 고희가 훌쩍 넘은 고인의 아들과 며느리는 여제자와 함께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르며 부모와 스승의 넋을 위로했다. 정치학 박사인 며느리 유혜량은 시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백방으로 뛰고 있다.

여순사건으로 김생옥처럼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 피해자는 1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70년이 지났지만, 이들의 원혼은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부모 형제를 잃은 가족들의 봉숭아 꽃잎처럼 으깨진 붉은 상처와 한도 아물지 않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가 나서 사과를 하고 이들을 보듬어야 한다. 제주 4.3의 연장 선상에서 특별법이 처리되고 명예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박상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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