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흥망성쇠 따라 청자조형 변화… 무덤 부장품에 반영
남도인의 사후세계 장식한 청자
한성욱의 도자이야기
강진고분서 출토
일본 중요문화재
2018년 08월 09일(목) 21:00
담양 고분 출토 청자투각상자. 일본 도쿄(東京)국립박물관 제공
고려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인식하고 현실에서의 생활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기를 염원하여 무덤을 조성하고 부장품을 묻었다.

무덤은 사후 세계의 관문이자 죽은 이의 마지막 쉼터로 시대와 지역에 따른 특징이 뚜렷하여 당시의 시대상과 가치관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무덤의 축조 방법과 출토 유물은 당시 사람들의 매장 풍습과 피장자의 신분, 사회적 역할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부장품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의 확산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질적.양적으로 빈약하다. 고려는 경종 원년(976)과 문종 37년(1083년) 신분에 따라 무덤의 규모를 제한하고 있다. 경종 때는 관리들의 품계에 따라 1품은 방(方) 90보(步), 2품은 80보로 높이는 모두 1장(丈) 6척(尺)이며 3품은 70보에 1장, 4품은 60보, 5품은 50보 등으로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으나 6품 이하는 모두 30보에 8척으로 한정하고 있다.

서인들에 대한 규정은 없지만 6품 이하의 규모보다는 작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종 때는 6품 이하 관인들을 6품과 7~9품으로 세분하고 새롭게 서인을 추가했다.



성종 9년(990) 효를 강조하면서 효자와 효손 등을 표창했는데 이 중 부모의 묘를 조성하여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드는 자에게 벼슬을 내리고 있다. 이는 신분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 서인들에게 분묘 조성을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경종과 문종 때의 규정은 기본적으로 매장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고려 전기부터 서인들에게도 무덤을 허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인들에게 무덤 축조를 허용한 것은 관리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한 것으로 품관의 마지막 단계인 7품~9품까지는 30보인데 서인은 5보로 규모가 매우 작아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되는 석곽묘와 토광묘의 규모와 부장품이 큰 차이가 없어 서인들이 축조한 무덤은 대부분 석곽묘와 토광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지방의 경우 대체로 석곽묘와 토광묘가 함께 축조되다 12세기 중엽 이후 석곽묘는 감소하고 토광묘가 증가하고 있다.

일상생활 용품을 중심으로 자기와 동기, 철기가 주로 부장되었는데 후기로 가면서 수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는 여진과의 전쟁을 겪고 있으며 대내적으로 이자겸과 묘청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사회가 혼란하였다.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겹쳐 발생하고 있어 이전보다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많은 사망자의 발생은 석곽묘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축조할 수 있는 토광묘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후 전염병이 계속 발생하였으며 거란과 여진, 몽골, 홍건적, 왜구 등과 지속적인 전란을 치르고 있어 토광묘가 선호됐던 것으로 판단된다.

경제적 여유를 가진 서민층이 증가했으며 성리학의 도입으로 화장을 금지하는 주자 가례의 영향도 컸다. 유교에서는 죽더라도 조상 숭배와 무덤을 통해 삶이 계속 유지되는 것으로 인식하여 시신의 보존과 매장을 중시했다. 국가와 사회적으로 매장을 장려했지만 시신의 처리는 개인의 성향이나 경제적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 장례는 크게 단장(單葬)과 복장(複葬)으로 나뉜다. 단장은 죽은 다음 시신을 노출시켜 소멸하거나 화장 또는 매장하는 것으로 흔히 풍장이라고 하는 장법이다. 복장은 사망, 화장, 매장 또는 가매장, 유골 수습, 안치, 매장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화장하거나 유골을 수습하여 다시 매장한 방식이다. 복장은 경제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서인들은 유골을 안치한 다음 매장하지 못한 사례도 있으며, 경제력이 있는 계층에서도 종교적 신념 등으로 매장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무덤은 죽은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사망자와 관련이 있는 유물을 우선 부장하고 있다.



일상생활의 핵심인 식사와 다과, 음주 등을 위한 도자기가 가장 많이 부장됐다. 도기는 호와 병, 청자는 발과 접시, 청동은 합과 발, 숟가락이 많이 확인된다. 호와 병은 술과 물 등을 저장하거나 운반하는데 사용했으며, 발과 접시, 합은 음식을 담았던 용기다. 부장품 구성은 사망자가 마지막으로 받는 의례로 피장자의 선호 음식을 반영해 선택됐다. 반상용기인 발과 접시, 병의 출토량이 가장 많이 확인되는데 청자를 생산하는 요장(窯場)에서도 확인되는 특징이다. 도자 부장품은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다양한 품질이 매납되고 있다. 양질의 고품격 청자로 모든 것을 갖춘 유형, 대접과 접시 등 소형 기종은 양질청자를 사용하고 병과 주자 등 대형 기종은 조질청자를 갖춘 유형, 대접과 접시는 조질청자를 사용하고 병과 주자 등은 도기로 갖춘 유형, 조질청자로 모든 것을 갖춘 유형, 발과 병 등을 필요에 따라 금속으로 부장한 경우 등이 있다. 이들은 무덤의 규모와 축조 재료, 시대적 변화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타난다. 즉, 제작이 힘들고 가격이 비싼 대형 기종과 성형이 쉽고 저렴한 작은 그릇들이 피장자의 사회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양질청자와 조질청자, 도기가 서로 겹치지 않도록 취사선택되어 조합을 이루어 일괄 출토되고 있다.

동전과 철제 낫, 철제 가위 등이 확인되는데 이는 묘지를 땅 신에게 매입해 시신이 안전하게 보호되기를 바라는 기원과 무덤 주변의 삼림과 초원을 벌채 소각하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을 반영했다.

경제력이 없거나 신분이 낮아 무덤을 조성할 수 없었던 계층도 있어 도자를 부장한 무덤은 적어도 하급 관리나 경제력을 갖춘 서인들로 판단된다. 전라도 지역에서 확인되는 분묘는 왕실을 비롯한 최상류층에서 축조하였던 석실분은 확인되지 않으며 석곽묘와 토광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전라도 부장품의 특징은 청자병과 대접, 접시, 청동 숟가락이 조합을 이루어 피장자의 발치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청자 유병과 구리 거울 등은 피장자의 가슴 부분에서 주로 확인되며 동곳은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 많이 확인되고 있다. 청자는 대부분 사용에 의한 마모 흔적이 확인되고 있어 생전에 사용하던 것을 매납한 것으로 보인다. 부장품을 별도로 제작해 매납하던 최상류층을 제외한 계층에서는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청자 가운데 선호도가 높고 상태가 양호한 것을 선택해 함께 묻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에 부장되는 병과 주자 등은 대부분 입술 또는 주구(注口) 부분을 깨드려 매납하고 있으며 향로와 주자, 매병 등 뚜껑이 있는 그릇들은 뚜껑과 동체를 각각 분리 매납하여 온전하게 조합을 이루어 출토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



전라도 고려 분묘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1기는 석곽묘가 중심을 이루는 9세기 중반~10세기 전후로 아직까지 청자가 생산되지 않아 도기를 주로 매납하고 있다. 도기 가운데 병이 중심을 이루며, 청동 허리띠도 확인되고 있다. 유물은 대부분 피장자의 머리맡이나 가슴 부분에 놓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밑에 놓는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2기 역시 석곽묘가 중심으로 이루는 시기로 10~11세기다. 가장 많이 확인되는 유물은 청동 용기이며 해무리굽 완과 병, 대접, 접시 등 청자의 매납이 등장하는 시기다. 2기는 청동 용기가 널리 사용됐으며 청자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도기를 비롯해 청동, 철 등 다양한 재질의 부장품이 상.중.하 위치에 관계 없이 매납됐다.

3기는 석곽묘와 토광묘가 함께 축조되는 12~13세기로 청자의 전성기다. 이 시기는 청자의 매납이 성행해 청동기와 함께 부장품의 중심을 이루며 도기는 일부 확인되고 있다.

청동 용기의 비율이 이전 시기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며 동곳과 청동 숟가락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데 숟가락은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질 만큼 수량이 많다. 매납 위치는 상.중.하 모두 확인되지만 발치에 놓는 사례가 증가한다. 12세기부터 13세기 전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이 안정된 시기로 청자의 기량이 절정에 이르러 비색의 고품격 양질청자들이 제작되고 있는데 전라도 지역 무덤 출토품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잘 반영하고 있다.

4기는 토광묘가 주로 사용되는 시기로 13세기 후반~14세기다. 이 시기 무덤은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며 현재까지 석곽묘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이 시기는 몽고 침입이 본격 시작돼 전라도까지 많은 피해를 주었던 시기다. 이후 몽고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수탈, 일본 원정 등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던 시기다. 왜구의 본격적 침입으로 강진의 청자 요장이 타격을 받아 장인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품질이 저하되는 시기와도 맞물린다. 무덤의 조성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다. 이 시기의 청자는 실용성과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품질은 퇴화돼 기벽이 두터워지며 기형은 커지고 있다. 문양은 간략화되거나 집단문양이 도식화.양식화되고 있으며 유색도 점차 어두운 색조로 변해가고 있어 매우 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남지역 고려 무덤에서 출토되는 청자는 이 지역 고려인들의 위상과 역할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청자 생산의 핵심적 역할을 하던 지역의 현실을 반영한 고품격 양질청자 등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어 전남의 정치적 영향력과 함께 아름다움을 가까이에서 감상하고자 했던 남도인의 지역 정서를 충분히 반영한 결과다.

생산도 중요하지만 소비자의 탁월한 안목이 명품 청자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고 볼 수있다. 고려 청자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함께 청자의 조형이 변화되고 있어 시대변화에 따른 무덤 부장품 양상은 고려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하다.






9마리 용 형상화 구룡형정병 압권

파도속 치솟는 용 승천할 듯 긴박감




고려 청자의 성지(聖地)인 강진에서 생산돼 강진 고분에서 출토된 청자 중 ‘구룡형정병(일본 중요문화재)’이 가장 유명하다.

이 병은 담양 고분에서 출토된 청자투각상자와 함께 전남지역에서 출토된 청자의 백미로 꼽힌다. 정병은 금속기를 기본으로 하지만 청자로 만든 경우도 많이 남아 있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을 의미하며 부처님과 보살에게 정수를 바치거나 관욕(灌浴) 의식 등에 사용됐다. 관음보살이 지니는 물건 중의 하나이며 스님이 반드시 지참하는 십팔물(十八物) 가운데 하나다.

구룡형정병은 일반적인 정병과 달리 9마리의 용을 형상화 해 만든 명품 중 으뜸으로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자 가운데 1점이다.

입수구(入水口)와 출수구(出水口), 환대(環臺)의 윗면, 어깨 부분에 세밀하게 표현된 9마리의 용을 붙여 만든 이례적인 정병으로 어깨와 동체에는 머리와 연결되는 몸을 옅은 부조(浮彫)로 표현하고 있다.

파도 속에서 힘차게 역동적으로 상승하는 모습이 긴박감을 주고 있어 금방이라도 승천할 기세다. 눈은 철화로 그렸으며 비늘과 파도는 칼날을 눕혀 윤곽을 그린 다음 얕은 선각 기법으로 정밀하게 묘사해 섬세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부분적으로 불완전 용융된 곳이 있으나 전성기 비색(翡色)을 간직하고 있는 고품격 양질청자로 손색이 없다. 승반(承盤)과 함께 출토됐으나 현재 승반은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

정병에 구현된 아홉 마리 용은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는 일화(九龍吐水)에 그 연원이 있어 불교국가 고려의 시대적 상황과 무덤의 주인공, 정병을 만들던 장인의 독실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민족문화유산연구원장 한성욱의 도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