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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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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역사기획

역사기획

광주 동구는 26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동구 계림동 푸른길공원 원형광장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독립투쟁 기록사진 60여점을 전시한다.

독립운동 재평가 좌우이념 벗어야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가 사회주의 활동 전력 탓에 여전히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남북 화해 분위기에도 여전히 벽이 높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낙인이다. 대표적 인사가 김범수(1899~1961), 이기홍(1912~1996) 선생이다. 김범수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1919년 광주의 3·1운동인 '3·10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태극기를 제작·공급했고 일본 군·경에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기홍 선생은 1929년 광주 고보 재학 당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투...
1919년 2· 8 독립선언이 울려 퍼진 도쿄 치요다(千代田)구 니시간다에 위치한 옛 재일본 동경기독청년회 건물 터. 동경 Y건물이 헐리고 그자리에 6층 건물이 들어서 세탁 용역업체 등이 입주해 있다.

도쿄항일 현장 가다=와세다大 앞 산쵸안 식당서 독립선언서 작성

글·사진=도쿄 이건상 선임기자 "조선청년독립단은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 만국의 전에 독립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8일 오후 2시, 적국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폭발했다. 조선 유학생 600여명은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혈전을 결의했다. 이어 '일한 합병이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하니 독립을 주창' 한다는 4개항의 결의문도 외쳤다. 그들은 강당을 박차고 나가 도쿄 도심으로 진출하려 했다. 일제 경찰은 건물을 에워싸더니 무...
광주전남 시도민과 전국 유림이 1961년 전국에서 처음 광주공원에 건립한 '대한의사 안공 중근 숭모비'. 1987년 중외공원으로 이전한 뒤 1995년 맨 위 비신 대신에 동상을 세우면서 숭모비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국가보훈처 제공

숭모비 복원 5대 원칙… ①최초 비신부터 찾아라

광복 후 전국 최초로 광주에 건립됐던 '안중근 의사 숭모비'를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숭모비를 복원·건립하는 것은 광주시는 물론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땅히 나서 해결해야 할 과업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에 향토사학자인 노성태 국제고 수석교사,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사 등 전문가들로부터 숭모비 복원 5대 원칙을 들어봤다. ●비신(碑身) 승모비 복원의 성패는 비신(碑身)에 달려있다. 비신은 비...
광주전남 시도민과 전국 유림이 1961년 전국에서 처음 광주공원에 건립한 '대한의사 안공 중근 숭모비'. 1987년 중외공원으로 이전한 뒤 1995년 맨 위 비신 대신에 동상을 세우면서 숭모비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국가보훈처 제공

전국 제1호 ‘광주 안중근 숭모비’가 사라졌다

광주·전남 지역민들이 해방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1961년 광주공원에 건립했던 안중근 의사 숭모비가 사라져 버렸다. 숭모비는 1987년께 중외공원으로 이전해 상당기간 존치했으나, 1995년 숭모비 좌대를 재활용 안중근 동상을 세우면서 실종, 25여 년 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순흥안씨 문중 등에 따르면 지역유림과 시도민들은 1961년 4월3일 일본 신사, 일본군 충혼비가 있던 광주공원 내 성거사지 5층탑 뒤편에 '大韓義士安公重根崇慕碑'(대한의사안공중근숭모비)를 제작, ...
광주 북구 중외공원 내 자리하고 있는 안중근 동상. 1961년 건립한 안중근의사숭모비의 기단부는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단 위에 세운 비는 확인할 수 없었다.

중외공원에 동상만 덩그러니… 숭모비 복원·재건립 절실

1909년 독립 투쟁의 첫 총성을 울렸던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인 숭모비의 행방이 묘연하다. 1961년 광주공원에 건립된 뒤 1987년 중외공원으로 이전, 그 후 1995년 숭모비 대신 동상을 세우면서 비석은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안중근 하얼빈 의거 110주년인 지금, 전국 최초의 안중근 기념비인 숭모비를 다시 살펴봐야 할 시점이다. ● 숭모비 건립과정 숭모비는 1960년 4·19혁명 후 친일파를 등용한 이승만 ...

광주 3·1운동 다시 서술되어야

광주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던 103명의 재판기록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본 광주 3·1운동은 『신동아』(1965.3)의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 『광주시사』(1993), 『양림교회 90년사』(1994), 『수피아 100년사』(2008), 『광주‧전남 독립운동사적지Ⅰ』(2010)의 서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판결문을 통해 확인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하나, 최흥종‧김복현의 서울 상경일은 3월 2일이고, 최흥종이 3월 5일 서울에서 체포되자...
지난 2014년 광주 남구 양림동 수피아여자고등학교 3·1 만세 운동 기념동상 앞에서 고교생들이 제95주년 3·1절 기념 '만세 재현'행사를 열고 있다.

광주 3·1운동의 주역은 학생이었다

연령 및 직업 재판을 받은 103명 중 최연소자는 수피아여학교 학생 강화선으로 16세였으며, 최고령자는 두 아들과 함께 참여한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 출신의 이주상으로 52세였다. 10대는 강화선 등 31명이었고, 20대는 김강 등 58명, 30대는 김복현 등 10명 그리고 40대와 50대는 각각 2명이었다. 10대와 20대가 89명으로 전체 86.4%를 차지하고 있음은 광주 3‧1운동이 학생과 청년이 중심이 된 만세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모의하고 준비했던 지도그룹인 '김복현 외 21명'을 연...

‘조선독립광주신문’ 제작

3월 10일 시위에서 다수의 주도인물이 체포되자, 시위에 참가하였던 제중원 회계직원이던 황상호는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다음 거사를 위해 윤익선 명의로 발행되었던 「독립신문」 제1·2호를 모방한 『조선독립 광주신문』 1~3호를 발간하였다. 3월 11일, 황상호는 자택에서 제중원 동료인 홍덕주·장호조와 함께 제중원 등사기를 이용하여 황송우(황상호의 가명) 사장 명의의 '조선독립 광주신문' 1호, 300부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13일, 홍덕주는 광주 큰 장에서, 장호조는 광주시내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하였...

광주 3·1운동, 103명이 재판을 받았다

광주 3‧1운동의 확산 광주에서의 만세 운동은 3월 10일에만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1일에도, 숭일학교와 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되어 수백 명의 시위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시내를 돌며 시위를 했다. 그리고 13일 큰 장날은 장꾼들을 포함한 약 천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중 일부는 시위행진도 하였다. 그러나 미리부터 이에 대비하여 배치해두었던 헌병·경찰에 의해 11일과 13일에도 23명이 체포되었다. 광주상인들도 연일 계속되는 만세시위에 동조하기 위해 3월 26일부터 철시하였다...

2-무등벌에 울린 만세 함성

6일 남궁혁 집에서의 모의 후 임무가 정해지면서 모의 참가자들은 8일 큰 장날의 독립만세를 위해 각자가 맡은 일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다. 숭일학교 농감인 송흥진과 교사 손인식은 숭일학교 소유의 등사판 2개를 가지고 와 남궁혁의 집에서 김강에게 건넸고, 강석봉은 7일 아침 일찍 시내 조창(朝倉)·대강(大岡) 상점에서 백지 만장을 3천원에 구매하여 한길상에게 건넸다. 등사판과 용지가 갖춰지자 한길상, 김용규 등은 남궁혁의 집에서 3‧1독립선언서 등을 인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 관헌이 주목하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