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김강>말의 권력, 셰익스피어의 세상보기

김강-호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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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김강(호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셰익스피어는 문화예술과 관련지어 빈번하게 언급되는 이름이다. 그의 작품은 이제 보편문화의 상징이자 문화자본으로서 글로벌하게 유통 중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무려 450여 년 전 런던 외곽 유흥가에서 미천한 신분의 극작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후일 베르디와 멘델스존은 그의 이야기들을 오페라와 교향곡으로 우아하게 꾸며냈고, 할리우드버전 셰익스피어 영화는 20세기 지구촌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신출귀몰 그의 히어로들은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섭렵 후 청소년 만화에도 쿨하게 등장한다. 셰익스피어는 대중문화의 감초 격으로 우리 주위에 상존한다.

도심의 신발백화점에서는 ‘맥베스’라는 상표의 신발이 판매된다. 서울 명동에는 ‘오셀로’라는 남성의류 브랜드숍이 성업 중이다. 미국 아마존닷컴은 ‘셰익스피어’라는 브랜드의 레저와 낚시용품을 판매한다. 대전 유성에는 한때 ‘셰익스피어’라는 유흥주점이 개점했다. 셰익스피어의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벤 존슨의 말대로 그는 한 시대를 넘어서 만대를 풍미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으뜸이다. 셰익스피어의 무대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왕과 귀족, 군인과 상인, 그리고 하인과 도둑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그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고 즐비하다. 지위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그들의 행위와 운명은 매우 ‘인간적’이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사람들 속에서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유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와 우리의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 미적거리를 유지한 채 관조하기보다는 부지중에 빨려든다.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는 서로간의 말, 대화로 들려준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통해서 말의 ‘위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말의 위협은 빈말이든 정말이든 누구든 예외 없이 무섭게 파고든다. 세상을 말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진리를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보여준 셈이다.

‘맥베스’에서 마녀들의 ‘입’을 통해 제시되는 “선은 악이요, 악은 선이다”라는 변증법적 수수께끼는 맥베스의 뒤집힌 운명을 예시한다. 세 마디 예언의 말 때문에 현재의 충신은 미래의 반역자로 살해당한다. 햄릿은 아버지 유령이 허공에 남긴 복수의 메아리를 존재이유로 삼아 자신을 광기로 무장한다. 리어왕은 막내딸의 가식 없는 사랑의 말에 분노하여 자제력을 잃는다. 오셀로 역시 이아고가 흘린 질투에 속아 자신의 내부에 시각적 증거를 만들어낸다.

말의 이중적 플레이는 현실에서도 위력적이다. 우리는 말로서 스스로를 포장하고 위장한다. 흔히 상대의 말을 진심으로 여긴다. 나의 말이 너에게도 마찬가지다. 너의 말을 나의 당면한 처지에 비추어 이해하고 수용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오직 말하는 자만이 품고 있는 일방적 진실이다. 속칭 ‘혼네’와 ‘다테마에’의 의도는 말하는 자가 결정하기에 상대의 해석과 생판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마치 화려한 꽃 속에 독사가 숨어있는 꼴이다.

셰익스피어는 사람의 운명이 결국 말에 따라 휩쓸린다는 점을 꼬집는다. 문제는 말 속에 담겨있는 상대의 진심을 내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주인공들이 경험하는 인간적 한계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미숙한 판단이나 가치의 혼돈은 모두 말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이 때론 악이 되고, 악은 다시 선이 되는 그런 곳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은 나를 숨기고 너를 속일 수 있는 껍데기인 셈이다. 나를, 우리를 진정한 주체로 규정하는 절대적 수단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말로 이뤄진 것이다.

최근 조국과 양정숙에 연이어 ‘정의기억’연대 윤미향의 행적에 대한 진위논란으로 연일 주변이 요란스럽다. 그 확진세가 자칫 코로나를 누를 태세다. 혹여나 누구는 내편이라 믿었던 그들에 대한 윤리적 의심에 배신의 울분도 느끼지 않았을까. 그들이 공개한 수많은 말들이 어느 게 사실이고, 어느 게 변명인지 당최 헤아리기 어렵다. 정직한 듯한 미소 속에 욕망으로 얼룩진 비수가 숨겨져 있다면 이 어찌된 영문일까. 정의에 대한 기억이 우리와 전혀 다른 것인가. 그들의 진보는 위선적 포장이었나. 아니면 보수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선동일까. 선과 악의 치열한 수수께끼다.

스콧 피트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사람의 평가는 마지막까지 신중하라고 충고한다. 말보다는 ‘행동’이 사람을 만든다고 보았다. 영화 ‘킹스맨’의 슬로건과 흡사하다. 셰익스피어는 말에 대한 맹신과 과신을 경계한다. 말은 진심이나 진리의 표상이 아니다. 관계와 상황의 산물이니 타인의 달콤한 혀에 말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력을 주문한다. 말과 행동, 곧 나를 드러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