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공간 만들고파”

◇광주 영화인 조대영을 만나다
현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등 지역 영화계 핵심으로
비디오테이프·책 7만개 수집 중… "영화도서관 건립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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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동구 계림동의 한 아파트 지하실에 마련된 조대영씨의 비디오테이프 아카이브.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
광주 동구 계림동의 한 아파트 지하실에 마련된 조대영씨의 비디오테이프 아카이브.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

광주 동구 계림동의 한 아파트 지하. 어두컴컴한 지하실을 막고 있는 두꺼운 쇠문을 잡아당기면 주황빛 조명 아래 수북히 쌓여 있는 형형색색의 비디오테이프 5만개가 모습을 드러낸다. 발 디딜 곳 없이 빽빽한 40평 규모 지하실은 80년대 비디오 가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벽면에는 수십 년 전부터 차곡차곡 수집한 비디오테이프가 ‘금성’, ‘대우’, ‘RCA 비디오’, ‘SKC’ 등 출시사 별로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아카이브와 작업실 그 중간쯤에 위치한 이 곳은 ‘광주 영화’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인 조대영(52) 씨의 개인 공간이다.

한글 자막으로 볼 수 있는 귀한 영화들이 곳곳에 꽂혀있는 ‘보물섬’이다. 영화광들이 탐내는 이유다. 그러나 조 씨는 “이 비디오들은 상영하기 위해 모은 게 아니라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 수집했다”며 웃었다.

그는 현재 광주독립영화관의 프로그래머이자 영화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역에서 세 개의 영화 스터디를 기획·운영하고 있으며 하정웅 미술관에선 ‘해설이 있는 예술영화’ 코너로 영화와 예술을 연계하는 강의를 하는 등 지역 영화계를 이끌고 있다.

영화를 좋아했던 조 씨는 방위병 복무 때 ‘굿 펠라스’라는 영화 동아리를 만들어 영화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제대 후 1994년에는 전남대 시청각 실에서 ‘페미니즘 영화제’를 개최하며 언론인의 관심도 한 몸에 받았다. 이후 2000년 광주비엔날레 영상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등에서 일했다. 광주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거쳐 현재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역 영화계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됐다.

다수의 영화 행사를 기획한 영화인 조 씨는 올해부터 의미 있는 작업을 시작한다. 좋아하는 것을 곁에 두고 기쁨을 맛보던 것에서 나아가 수십 년간 모았던 수집물을 ‘공유’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아카이빙 작업을 목표로 뒀다.

조 씨의 또 다른 작업실인 산수동 지하실에는 영화 DVD, 책, 소설, 만화 등 책 2만 여권이 있다. 이 역시도 수십 년간 서울·부산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헌책을 수집한 결과물이다. 조 씨는 비디오테이프와 책을 한 공간에 모아 관람객들에게 추억과 감성을 나눠주고 장기적으로는 영화 인재 양성을 위한 허브로서 기능할 ‘영화 도서관’을 만들 계획이다.

“영화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요. 영화 정보를 얻고 영화에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가 토론되는 장소 말이에요. 관객들이 그 공간에서 ‘맞아, 나 비디오 빌려봤어’ 같은 향수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제가 비디오를 수집한 이유는 ‘재생’의 용도 보다는 비디오들이 많이 있을 때 풍기는 느낌 때문이거든요. 한 두 개면 중요하지 않지만 이렇게 많이 있는 공간에 들어갔을 땐 분명 개인에게 강한 감성을 줄 수 있어요.”

'광주 영화인'으로 불리고 싶다는 조대영 씨가 광주 산수동에 마련한 책 아카이브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
'광주 영화인'으로 불리고 싶다는 조대영 씨가 광주 산수동에 마련한 책 아카이브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
조대영씨가 수집한 비디오테이프를 설명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
조대영씨가 수집한 비디오테이프를 설명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비디오테이프 5만개, 다양한 분야의 책 2만권 등이 소장될 영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선 ‘공간’이 필요하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고 쉽게 방문할 수 있는 도서관을 마련하기 위해 조 씨는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지만 혼자서는 쉽지 않다.

“봉준호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영화를 봤고 책도 읽으면서 성장했어요. 광주에서도 영화 인재가 발굴되기 위해선 그 기반이 확실히 조성돼야 하거든요. 영화 자료들을 모아두고 공간에서 자극을 받고 상상을 할 수 있는 장소말이에요. 광주에서 그런 토대를 만들 수 있는 작업을 펼치고 싶어요.”

조 씨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호모 시네마쿠스'(2019)에는 그의 수집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다. 영화 속에서 조 씨는 서울에 올라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광주로 돌아갈 차비’ 마저 수집하는 데 사용하는 조 씨의 모습이 담긴다.

“비디오테이프뿐만 아니라 영화책, 소설, 만화, 그래픽 노블, 인문학 서적 등을 모았어요. 소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려고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에 옮겨져서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오는 공간을 만들고 싶지만 공간을 섭외하는 데 어려움이 큰 게 사실이에요.”

광주시는 지난해 광주영화진흥조례를 통해 지역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한 신호탄을 쐈다. 그러나 위원회 구성이 늦어지면서 여전히 타지역 영화 발전에 비해선 느린 걸음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생을 바쳐 수집했던 결과물인 책과 영화를 ‘소유물’이 아닌 ‘공유물’로 의미를 갖게 되길 꿈꾸고 있는 지역 영화인이 있다는 점은 반갑다. 새로 리모델링한 전일빌딩 등 광주 문화 공간들과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글·사진=최황지 기자

최황지 기자 orchid@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