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광장>공간의 문화적 소비와 창조

천세진(문화비평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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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진(문화비평가·시인) 편집에디터
천세진(문화비평가·시인) 편집에디터

“광주는 소비 도시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맞는 말일까? 어느 도시든 소비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소비하는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산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광주는 소비 도시다.”의 의미는, 대규모 산업단지가 눈에 띄지 않아, 소비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정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대규모 산업단지의 존재 유무가 도시의 발전을 가름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없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형 산업시설이 집중되어 호황을 누리는 도시들은 해당 산업이 위축될 경우 도시가 함께 위축된다. 조선업이 위축되며 조선 도시들이 어떤 상황을 맞았는가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시적인 산업단지를 중요시 여기는 것은 2차 산업적 경제마인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생산과 소비의 문제를 광주의 문화 시장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상징적인 문화공간이 필요한데, 양림동이 적당하다. 지금 양림동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인 공간은 소비 성향이 짙은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공간은 십중팔구 문화의 생산이 소비 속도에 맞추어 발전하지 못한다. 시장은 빠르게 답을 요구하는데, 문화 생산이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면, 문화 공간은 빠르게 부상했다가 빠르게 침몰할 가능성이 높다.

양림동을 찾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소비를 한다. 소비를 만든 양림동의 생산물은 ‘이장우 가옥’을 비롯한 옛집들과 골목들이다. 이미 오래전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주로 공급되는 생산물은 커피와 술이다. 문화는 언제나 다음 단계의 생산물이 필요한데, 그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대중은 점차 흥미를 잃는다. 관(官)이 주도해서 자본을 투입해도 문화 콘텐츠의 생산이 결국은 한계에 봉착하는 시점이 온다. 그건 자연스러운 문화생태 현상이다. 생태 변화가 느리게 진행되느냐, 빠르게 진행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다. 시장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문화콘텐츠의 생산이 이어져야 한다. 생산의 주체는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하고, 이때의 ‘사람’은 스스로 문화콘텐츠가 된 사람들, 이를테면 작가들이다.

양림동에는 ‘이강하 미술관’과 ‘양림미술관’이 있다. 두 공간은 ‘보존’과 ‘전시’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보존과 전시만으로는 양림동을 지속적으로 견인하기 어렵다. ‘한희원 미술관’, ‘윤회매문화관’처럼 현재 진행형의 예술 공간, 예술가가 일상을 보내며 문화를 생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많이 있어야 한다. 왜 예술이어야 하느냐, 양림동의 옛 공간이 예술적 목적으로 지어지고 보존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양림동을 찾는 대중은 양림동을 미학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 역사성을 넘어 이미 예술화 단계에 있다.

얼마 전 ‘윤회매문화관’에서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가 찻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윤회매문화관’를 운영하는 이는 작가이자 불교예술가인 ‘다음’ 김창덕씨다. 오랫동안 불교예술과 ‘윤회도자화’라는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 온 만만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지만, 그에게도 현실은 버거운 듯 했다. 임대계약이 끝나면 양림동에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작가가 떠나도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니, 다른 누군가가 찻집을 하면 양림동에서 없어지는 것은 없지 않느냐고, 찻집을 더 멋지게 꾸미면 더 나아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과연 공간과 찻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만들어질까?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단지 오랫동안 같은 위치를 점유해왔기 때문에 도시가 역사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략) 오래된 도시는 풍부한 사실들을 담고 있다. 이로부터 후세대 시민들은 장소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재창조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앞으로도 양림동은 위치를 점유하고 역사적·문화적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광주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재창조하는 공간으로 계속 지켜질지는 확언할 수 없다. 대중의 기호와 자본은 낭만적 기대를 갖기에는 언제나 즉물적이고 몰인정하다. 공간이 오래 가려면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이 그 안에 일상의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야한다. 사람이 떠나면, 남는 것은 곧 사라질 유행의 껍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