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떠난 학정 이돈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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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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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서예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1947~2020) 선생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서실을 찾아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여흥을 즐기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되짚어 보니 정작 학정 선생과 마지막으로 점심을 함께 한 것이 지난해 봄이었다. 그 후에 몇 차례 잔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서예원이 회사와 지척인데도 가서 뵙지 못했다. 식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지난해 10월 병원에 입원을 한 사실도 까맣게 모르는 결례를 범했다. 이제 와서 후회하고 탄식한들 무슨 소용인가.

지난해 2월 학정 선생이 보내온 학정연우서회의 소식지 ‘연우회보’에는 ‘교실에서 쫓겨난 한자와 서예교육’이라는 그의 글이 실려 있었다. 서예진흥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을 환영하면서 우리의 어문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사회 지도자들이 사자성어 쓰기를 좋아하면서도 한문 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현상을 개탄했다. 내용이 좋아 더 많은 사람이 보도록 신문에 기고로 다시 싣자고 전화를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고 전문을 메일로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전남일보 지난해 2월 20일자에 이 글이 다시 실린다. 아마 학정 선생의 외부 기고로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학정 선생은 호남 서단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사람은 완도 신지도에서 23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친 원교 이광사(1705~1777)다. 그의 제자로 전주에서 활동한 창암 이삼만(1770~1847)에 의해 남도의 동국진체는 꽃을 피운다. 일제 강점기 이후 남도 서맥을 이어온 서예가로는 근원 구철우(1905~1989), 송곡 안규동(1907~1987), 남룡 김용구(1907~1982), 소전 손재형(1903~1981) 등을 꼽을 수 있다. 송곡의 제자인 학정은 그 분들의 호남 서맥을 이어온 이 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다. 남도의 동국진체를 더욱 발전시켜 고유의 ‘학정체’를 개발했다.

서예 평론가들은 학정이 타고난 예술적 기질과 솔진한 성정, 미술적 식견, 문아한 취향까지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거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임서를 게을리하지 않는 그의 노력이 오늘날의 학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행·초와 전·예서에 모두 능하다. 한글 서예는 물론이고, 아산 조방원을 사사해 그림에도 일간견을 갖고 있다. 전북대 교수이자 서예가인 심석 김병기 선생은 학정의 글씨를 이렇게 정의했다. “학정의 글씨는 우선 필획이 살아 있다.…때로는 적당히 풀을 먹여 말끔하게 다림질을 해놓은 한산 세모시처럼 까칠하고, 때로는 고무줄이나 혹은 막 뽑아 김이 모록모락 피어나는 가래떡처럼 쫀득하게 살아 있으며, 때로는 새가 앉아 희롱하는 매화나무 가지마냥 나긋나긋하게 살아 있다.”

학정은 호남 서맥을 이어오면서 후진 양성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5년 학정서예연구원을 설립하면서 문하생들의 모임인 ‘연우회’가 발족한다. 1977년 제1회 연우회전이 열린 후 지난해까지 매년 끊이지 않고 42회의 전시회가 열렸다. 한국 서단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활발한 서예단체다. 그동안 학정의 지도를 받은 제자가 모두 1만2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에서 42명(2016년 고희전 당시)이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1982년에는 청소년 정서 함양과 서예 인구 저변 확대를 위해 ‘제1회 초중고생 서예작품 공모전’을 개최한다. 이 공모전은 2015년에는 ‘세계청소년 서예대전’으로 확대 발전했다. 1993년부터 중국과 국제교류전을 가져왔고, 수차례의 중국 전시회를 통해 민간 외교사절 역할도 톡톡히 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학정 선생은 비록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5·18 민주묘지를 비롯해 전국의 명산대찰, 기념관, 공원 등에 아로새겨진 그의 중후한 필력은 만세에 전해질 것이다. 예술가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이뤄진다. 이제 그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가 이뤄져야 할 시점이다. 학정 선생님, 이승의 무거운 짐 내려놓고 저승에서 편안하게 쉬소서.

박상수 주필 sspark@jnilbo.com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