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사형 민간인 72년만에 무죄

재심 선고… 법원 “더 일찍 명예회복 못한 점 사과”
시민단체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명예회복”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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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린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서 당시 사형을 당한 장환봉씨가 72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날 여순사건 재심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무죄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
20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린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서 당시 사형을 당한 장환봉씨가 72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날 여순사건 재심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무죄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

 ”장환봉님은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니며, 오로지 국가가 혼란스럽던 시기에도 몸과 마음을 바쳐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명예로운 공무원이었다. 70여 년이 지나서야 장환봉님에 대한 유죄확정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게 된 점을, 더 일찍 명예회복을 해드리지 못한 점을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

 20일 순천지원 316호 중법정에서 열린 여순사건 관련 재심에서 광주지법 순천지원 제1형사부 김정아 부장판사가 내란 및 국가 문란 혐의로 기소된 고 장환봉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소회를 밝히자 재판정에는 작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사형된 민간인에 대해 법원이 7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재판부는 “피고인 장환봉은 무죄를 선고하고 피고 신태수, 이기신에 대한 재심 청구에 대한 청구 절차는 청구인들의 사망으로 종료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포고령 제2호 위반은 미군정 시기에 발령되었고 이 사건 당시에는 미군정이 종식된 상태였다”며 “형법상 내란 부분에 관해 검사는 공소사실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고, 제출되었더라도 불법 구금 이후 수집된 증거로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 선고의 이유를 밝혔다.

 고 장환봉씨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철도기관사로 여수 14연대 군인들이 순천에 도착한 후 이들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체포돼 22일 만에 처형됐다.

 장씨의 딸은 2011년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겠다며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7년여 만인 지난해 3월 장씨 등이 적법한 절차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보고 재심개시를 결정했다.

 한 달 후인 지난해 4월 29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첫 재판이 진행됐지만, 검찰이 “공소사실을 특정할 만한 자료를 찾지 못해 공소 기각될 수도 있다”고 밝히면서 실체적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기회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재판이 난관에 봉착하자 시민사회단체는 1948년 당시 신문기사, 외신 보도, 국회 속기록, 판결집행명령서 등을 찾아냈고 2500여 명의 시민사회, 학자, 정계인사 등의 서명을 받은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하는 등 힘을 보탰다.

 이후 검찰은 장씨에 대해 ’14연대 군인들이 여수시 신월리 여수일대를 점령한 후 1948년 10월 20일 오전 9시 30분쯤 열차를 이용해 순천역에 도착하자 이들과 동조·합세해 순천읍 일원에서 국권을 배제하고 통치의 기본질서를 교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공소사실을 특정했다.

 이어 지난달 23일 열린 6차 공판에서 “장씨의 형법 제77조 내란죄 및 포고령 제2호 위반 국권 문란죄에 대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구형했고 재판부는 이날 무죄를 선고했다.

 여순민중항쟁전국연합회는 판결 이후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판결은 72년 전 11월 30일 순천에서 내란죄와 국권문란죄 혐의로 사형으로 돌아가신 46명과 여순민중항쟁 진행과정에서 돌아가신 희생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며 환영했다.

 이어 “절망과 슬픔 속에 일평생 숨죽여 살아왔던 유가족들을 아직도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로 겁박하는 무리들을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며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등을 요구했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