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선 ‘전남 511호’ 섬주민에게 희망 전한다

2020 희망을 나누는 사람들 ③·끝 병원선 ‘전남 511호’
전남 77개 도서 순회진료 ‘섬 마을 주치의’
의료에서 문화까지 희망을 싣고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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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병원선 전남 511호가 새해 첫 진료에 나섰다. 전남 511호는 남해 77개 섬 마을을 순회진료하는 바다 위 종합병원이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
6일 병원선 전남 511호가 새해 첫 진료에 나섰다. 전남 511호는 남해 77개 섬 마을을 순회진료하는 바다 위 종합병원이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

배가 보이자 섬 마을이 소란스럽다. 마을 반장님이 오랜만에 마이크를 켰다.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그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마을 어르신들은 군고구마와 생굴을 바리바리 싸들고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3개월여 만에 찾아온 ‘배’다. 여수 송여자도를 찾은 ‘전남 511호’. 병원선을 반기는 섬 마을 풍경이다.

전남 511호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종합병원’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을 태우고 섬마을을 찾아가는 ‘병원선’이다. 병원도 약국도 없는 외딴 섬이 전남에만 166곳에 달한다. 마땅한 의료 시설이 없어 아파도 제때 치료받기 어려운 섬마을 주민들에게 병원선은 소중하고 반가운 존재다.

6일 새해 첫 진료에 나선 전남 511호를 타고 여수 송여자도 주민들의 삶에 청진기를 대 봤다.

●섬 사람들에겐 최고 인기

송여자도는 여수시 신월동 관공서 부두에서 뱃길으로 1시간 30여분을 내달린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섬이 보이자 의료진들의 손길도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파스며, 위장약이며, 감기약이며 주민들에게 전해줄 상비약들을 6상자쯤 바리바리 챙겼고, 소형 보트를 바다에 내렸다.

보통은 주민들을 이 보트에 실어 데러와 병원선에서 진료하지만, 이날은 물때가 맞지 않아 선착장으로 배를 댈 수 없어 의료진들이 직접 섬으로 진료를 나가 보기로 했다.

“아이고 병원선 오셨소.” 병원선이 도착하자 부녀회장이 먼저 반긴다.

마을반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이크를 든다. “어저께 말씀드렸던 병원선이 지금 도착했습니다. 마을회관에 병원을 차렸으니 한 분도 빠짐없이 진료받고 가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나갈 때 쯤 20여 평 남짓한 회관에 도착한 의료진들은 서둘러 ‘임시 진료소’를 차렸다.

마을회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네모난 밥상을 펼치자 내과와 접수실이 생겼고, 보일러를 뜨끈하게 올린 온돌방은 한방과로 변했다. 한쪽 방에서는 간의 엑스레이까지 설치된 제법 그럴싸한 병원이 금세 만들어졌다.

송여자도에 사는 오숙희(70)씨가 손자뻘 내과의사 정하송(30)씨에게 하소연했다. “선생님, 요즘 안아픈 곳이 없는디 어째야쓰까?”

이곳에선 이성훈 한의사가 최고 인기였다.

여자 환자들은 뜨끈한 온돌방에 드러누워 침을 맞았다. 대부분 무릎 또는 허리가 아팠다. 겨울 갯벌에서 하루에 서너시간 이상 굴을 캐기 때문이었다. 침 놓는 한의사 이씨의 손도 굴 쪼듯 빨랐다. 수다꽃을 피우다가도 침 맞는 수십초 동안은 다들 조용해졌다.

50여 명 남짓한 섬 주민 대부분이 1시간여 사이에 밀어닥쳤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바다 위 작은 종합병원

전남 511호는 77개 섬을 순회한다. 한 해 치료하는 인원만 7300여 명. 항해사, 기관사, 조리사, 의료진 등 14명이 1년에 100일 넘게 바다에서 같이 먹고 잔다. 15년 넘게 남해앞바다에서 병원선을 몬 정병덕(55)선장은 “겉으로 보기엔 작아보여도 종합병원이 다름없다”고 자부심을 드러낸다.

정 선장의 말처럼 병원선은 185톤의 소형 선박이지만 갖출 건 다 갖췄다. 초음파장비부터 심전도기, 치과 유닛, X-RAY, 이동형 임상병리실까지 의료장비가 즐비했다. 의사는 젊은 공보의 3명. 실력만큼은 여느 병원 못지 않다.

내과의 정하송씨는 지난해 6월 감기 때문에 약을 타러온 권정심(82)씨의 코 위 반점을 보고 악성 흑색종을 진단해 소중한 생명을 구했다. 치과의 오병혁씨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충치치료도 척척 해낸다. 한의사 이성훈씨의 침술은 자타가 공인한다. 간호사가 따로 없어 보건소 주사들이 병원선 관리며 간호사 역할까지 모두 해낸다.

병원선은 때론 문화를 싣고 내달리기도 한다. ‘움직이는 예술정거장’ 프로그램이다. 문화혜택에서 소외된 섬 주민들에게 공예, 노래교실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

이처럼 주민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수 있는 것은 병원선 식구들 한 명, 한 명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기에 가능하다.

인원이 빠듯해 한 명이 2~3명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다반사다. 먼 낙도까지 진료를 떠날 경우 왕복만 9시간. 일주일에 3~4일은 배에서 보내야만 하는 ‘지옥근무’다. 사명감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10여 년째 병원선과 함께 하고 있는 김의중 주무관은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배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더 긴 탓에 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며 “그래도 병원선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 ‘이 일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병원선 식구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뱃머리를 여수로 돌리자 억센 비가 쏟아지면서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다음에도 환자 보러 다시 오라는 낙도의 거친 악수였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