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우도농악의 지역적 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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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농악-광주 광산구 편집에디터
광산농악-광주 광산구 편집에디터

호남우도농악이라면 영광우도농악과 광주 광산농악 혹은 진도걸군농악이 떠오른다. 주지하듯이 농악에는 경기농악, 호남농악, 영남농악, 영동농악의 분류가 있다. 이보형과 정병호가 정리한 ‘필봉농악'(문화재관리국, 1980)을 보면, 경기농악은 경기 영서농악과 충청농악, 호남농악은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으로, 영남농악은 경남농악, 경북농악 등으로 세분된다. 정병호, 이보형 외 여러 사람이 참여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농악, 풍어제, 민요편'(13권, 문화재관리국, 1982)에 의하면, 호남 우도농악은 전라도 서부지역에서 전승되는 농악을 가리킨다. 지역 범위는 전북 익산, 옥구, 군산, 김제, 정읍, 부안, 고창과 전남 영광, 장성, 광주, 나주, 함평, 무안, 장흥, 해남, 영암, 강진, 진도, 완도 등을 포괄한다. 양옥경은 호남 북서부지역에 해당하는 정읍, 익산, 부안 등과 중서부 해안지역에 해당하는 고창, 영광 등에서는 일찍부터 전문 걸립패에 의한 걸립굿 공연이 성행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일찍이 보천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정읍을 중심으로 하여 김제, 익산, 부안, 고창 등의 지역은 해방 이전 시기에 ‘정읍 농악단’이란 전문 걸립패가 등장하고, 지역 출신의 우도농악인들 대부분이 이 단체 활동을 경험하면서 호남 우도농악의 전승 및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 현재의 호남 우도농악은 판굿을 위주로 정읍, 익산, 김제, 부안, 고창, 영광, 광주 광산, 진도 걸군농악 등 무형문화재로 보존 전승되고 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채록된 우도농악 판굿 음원자료는 우도농악 판굿 실체를 접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다.

지역간 교섭과 혼종을 통한 농악의 재구성

농악은 한 지역에서 생성되어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역간 교섭과 혼종을 통해 나뉘고 합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이런 맥락을 잘 정리해둔 박혜영의 글을 인용한다. 1990년 제3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광산농악을 소개한 내용이다. ‘광주시 광산일대에서 전래되어온 우도농악, 정월 대보름에 집집마다 돌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자생한 일종의 마을굿 놀이로써 걸궁굿 풍장굿 판굿 등을 벌임’. 과연 그럴까? 실제로는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주민들이 꾸린 농악단과 영광의 단골 출신 전경석과 연합하여 일군 ‘우도농악’이었다. 함평 월야면 용월리가 고향인 정득채는 전경환과 전경석을 만난 인연으로 우도농악 판굿을 익히고 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마륵농악의 상쇠 전경석이 사망하자 부쇠를 맡던 정득채가 그의 뒤를 이어 농악단을 이끌게 된다. 당시 농악단에 김종회, 김회열, 김동언, 서창순 등 전경환과 친분이 깊은 예인들이 합류한다. 거주 지역이 제각각이었지만 전경환과 심석궁의 인맥을 잇는 이들 사십여명이 모여 단체를 꾸린 것. 경연대회 출전 자격을 얻기 위해 거주지를 옮기는 일도 빈번했다. 광산농악의 전신은 ‘마륵농악’이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면서 정득채(함평 월야출신)의 주도로 개명된 것이다. 이 마륵농악단에는 소촌농악 단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8년 ‘소촌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했다가 이듬해 ‘마륵농악’으로 대회에 참가한다. 내부적인 문제들이 있어 갈등이 커지면서 각 단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소촌농악단은 송정 우도농악단으로 명칭을 바꾼다. 이는 마륵농악단이 활동무대를 넓히기 위해 ‘광산구’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바꾼 것과 유사하다. 지역명을 딴 농악단 이름은 농악단의 유래와 전통, 활동반경을 좌우했다. 농악단의 이름 짓기는 일종의 활동 전략에 해당했던 셈. 박혜영이 정리한 바로는, 광산농악은 영광 우도농악, 송정우도농악(소촌농악), 함평월야농악이 습합되어 구성된 것이고, 각기 마륵농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가 후에 광산농악으로 정착되었다.

두레풍장은 농악일까 아닐까

지역뿐만이 아니라 장르간에도 교섭 혹은 분리가 있었다. 예컨대 두레 풍장은 농악의 범주로 넣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김현숙은 주장한다. 사실 큰 범주로서의 농악은 섣달 그믐날의 매굿, 정월의 마당밟이, 걸궁, 김매기철의 두레굿, 백중날 호미씻이 등이 포함된다는 것. 사례가 있다. 무안읍 이계선의 제보에 따르면, 부잣집 논을 매거나 모내기를 할 때는 20~30여 명씩 농악단을 꾸렸다. 이들이 농악 연주를 하고 노래도 불렀다. 마을에서는 여러 사람이 부르는 들노래의 후렴 소리를 듣고 일이 언제 끝나는지 알았을 정도였다. 농악은 정월 마당밟이뿐 아니라 농사일에도 함께 하였던 것이다. 모심을 때는 못방구라 하여 북을 양손으로 치는 북놀이를 하였다. 현재 진도지역에서 추는 북놀이 형태다. 진도지역 들노래에도 논에 들어가서 쌍북을 치는 못방구가 있다. 여기서의 방구는 반고, 벅구 등의 이름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는 중형 크기의 북이나 연행 장르를 말한다. 동경대 이또아비토교수가 1970년 초에 찍은 사진을 보면 진도지역에서도 여럿이 반고를 들고 모내기 풍장놀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레패의 농악도 마당밟이와 비슷하게 농기, 영기, 꽹과리, 징, 북, 장고 등의 편성을 갖는다. 농기(農旗)는 긴 대나무에 꿩장목 깃을 달고 깃발이 너덜너덜 달린 큰 기폭을 달았다. 농기는 용기(龍旗)라고도 하는데, 민화(民畵)의 양태와 많이 닮아 있다. ‘신농유업’, ‘농자천하지대본’ 등의 글자를 쓰기도 한다. 농군들이 김매기 하러 논에 들어갈 때 치는 굿을 두레풍장굿이라 한다. 처음 논에 들어갈 때는 들풍장이라 한다. 김을 맬 때도 풍장을 치고, 김매기를 마칠 때는 날풍장이라 하여 농악놀이를 한다. 참고로 김매기가 끝나는 하루 날을 잡아 농군들이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나누어 먹으며 당산에서 농악을 치고 노는데 이 놀이를 지역에 따라 ‘백중놀이’, ‘술멕이’, ‘호미걸이’라 한다.

농기(農旗) 그림에서 뛰쳐나온 잡색 양반

나는 호남우도농악에 속하는 무안읍 양림마을의 잡색 복식을 주목하고 있다. 대개 농악단 잡색으로서의 양반 캐릭터는 게으른 논주인 정도의 컨셉이다. 하지만 양림마을의 잡색 양반은 한편으로 ‘살보’를 들었다. 일반적으로는 살포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살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살포갱이(경남 영산)’, 살피(경북), 논물광이(강원), 살보(전남), 삽가래(전남 보성), 손가래(경북), 살보가래(전남 강진)’ 등으로 불린다. 손바닥만한 날에 비하여 자루는 길어서 2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대나무를 자루로 박아 쓰는 일이 많다. 날의 형태는 네모난 날 끝을 위로 두 번 구부리고 괴통을 단 것, 깻잎 모양으로 앞이 뾰족하고 끝이 위로 두 번 구부러져서 괴통이 달린 것(이를 오리살포라 한다), 말굽쇠형 따비처럼 직사각형의 몸채에 말굽쇠형의 날을 끼운 것, 괭이의 날처럼 위로 한번 구부리고 괴통을 단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이상하게 생긴 이 도구를 어디에 쓰는가?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 중의 하나다. 논에 나갈 때 지팡이 대신 짚고 다니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용기(龍旗) 혹은 농기(農旗)로 호명되는 농악단의 깃발을 보면 염제 신농씨가 들고 있는 살보가 보인다. 주지하듯이 염제 신농씨는 신화시대의 상제(上帝) 즉 하나님이다. 농업과 의약을 최초로 재배하고 발명한 신이기도 하다. 강진 용소마을의 농기를 보면 염제신농씨가 용을 타고 살보를 든 형상이 그려져 있다. 거북이와 물고기 등을 포함해 다양한 민화적 해석은 차후 지면을 기약한다. 신농씨가 들고 있는 살보는 수도작의 키워드라고나 할까. 농업의 코어코드라고나 할까. 농사의 신이 들고 있는 핵심적인 농사도구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무안우도농악에서는 담뱃대나 들고 거드렁거릴 주제의 잡색 양반이 왜 살보를 들고 다니는 것일까? 무안우도농악이 바로 두레풍장 농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이보형에 의하면 이 두레농악 또한 당산제 등의 의례음악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농악대는 농신을 받아 들에 나가 한 바퀴 돌고 마을마당에서 농신제를 지내기도 하고 농사풀이라는 농사짓는 모양새를 꾸미기도 한다. 이러한 농신제나 김매기 할 때의 풍농제 농악을 두레굿이라 한다. 진행 형식이 당산제와 같으므로 종교적인 농악이 두레농악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후 여러 용례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무안읍 양림마을의 농악은 정월 당산제와 김매기 두레 풍장이 마치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살보는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많으며 임금이 하사하기도 했다. 나는 이를 두레풍장과 관련하여 주목하고 있다. 장차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편의주의적 구분법에 대해서도 이의제기를 할 요량이지만 마당밟이와 두레풍장을 변별하여 논의해왔던 저간의 관행에도 문제제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 살보를 든 농악의 잡색 양반이 농기 민화로 들어갔거나 농기의 신농씨가 농악의 잡색 양반으로 뛰쳐나왔거나, 남도의 두레풍장과 농악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남도인문학 팁

호남우도농악, 마을농악에서 전문연예농악으로

본래 농악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가 아니다. 상모를 돌리고 오방색 유니폼을 입으며 사물악기들을 울리는 방식은 근대기에 재구성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차후에 설명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민간의 풍속을 다양하게 포착했던 단원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 왜 현재 형태의 농악이 단 한 번도 그려지지 않았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농악은 정읍의 신흥종교 보천교를 겪으면서 급속하게 연예장르화 되었고 근대기에 접어들어 발빠르게 연예농악으로 성장하였다. 양옥경은 우도지역 농악의 전문 연예화 과정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근대의 출발로부터 해방 직전까지는 우도지역 농악역사에서 연예농악 형태의 농악 공연문화 형성 시기다. 군악성격을 강조한 내용과 공연 논리로 구성한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둘째,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직전까지의 시대는 농악사에서 연예농악의 양식화 및 정형화의 출발 시기다. 가장 상징적인 문화 사건은 농악경연대회의 출현이다. 셋째, 1960~ 1980년의 시간대는 초기 문화산업형 농악 공연양식의 출현과 이와 관련된 향유문화가 형성된 시기다. 여성농악단의 흥망성쇠, 남성농악단의 쇠락, 산업근대화의 침투로 인한 전반적인 민속예술양식의 추락이 있었다. 넷째,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직전까지의 시대는 무형문화재 제도와 지역 중심주의에 영향 받아 지자체 기준으로 범주화 및 고착화되는 경향을 낳았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도농악이라는 포괄적 이름으로 불렸던 농악이 문화재제도의 직접적 영향권에 들면서 김제농악, 정읍농악 등 지자체 행정단위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 주요 원인의 하나가 무형문화재제도다. 판소리의 동편제 서편제의 구분법도 그렇지만 좌도농악 우도농악 등으로 나누는 구분법도 조만간 다시 정리해볼 생각이다.

강진 용소마을 농기 신농씨와 살보 확대부분 편집에디터
강진 용소마을 농기 신농씨와 살보 확대부분 편집에디터
강진 용소마을 농기 편집에디터
강진 용소마을 농기 편집에디터
두레풍장의 신농유업기와 용기 편집에디터
두레풍장의 신농유업기와 용기 편집에디터
영광우도농악 잡색-영광21 편집에디터
영광우도농악 잡색-영광21 편집에디터
진도소포걸군농악-향토문화전자대전 편집에디터
진도소포걸군농악-향토문화전자대전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