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우타아소비(歌遊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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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시 박물관의 원무 그림 편집에디터
나고시 박물관의 원무 그림 편집에디터

송가인의 트로트로부터

십여 년 전 내 논문을 통해 주문했다. 한국의 민요를 메이저 무대에 세우는 또 하나의 ‘하지메치토세’ 혹은 판소리기법 그대로 메이저 무대에 승부하는 ‘아사자키이쿠에’가 출현할 수 있는 인식전환 말이다. 그 대답의 일부를 송가인이 해주었음을 지난 칼럼에 명토박아두었다. 송가인의 트로트가 독창적이라는 언설에 대답이 들어있다. 나는 판소리를 비롯한 남도민요의 독특한 시김새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송가인 열풍이 지닌 사회현상은 따로 분석하겠지만 그 신드롬을 가능하게 한 기술 중의 하나가 남도풍 시김새라는 의미다. 남도풍이라니? 송가인의 엄마는 진도 혹은 남도를 대표하는 무당이다. 송가인은 본래 판소리 전공자였다. 엄마를 도와 씻김굿 의례를 도운 적도 있다. 남도의 무가, 판소리, 민요의 시김새들이 고스란히 트로트의 발성에 이입되었다. 혹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실제 그녀의 노래 창법이 그러하다. 시김새는 음을 장식하는 기술을 말한다. 연전 본 칼럼을 통해서 자세하게 논의해둔 바 있으니 참고 가능하다. 지면을 달리하여 논의하고 싶은 것은 이 시김새 중심의 창법을 아예 남도 트로트로 명명하는 것. 트로트 장르의 하위 분류라고나 할까. 판소리 등 남도소리꾼들이 트로트를 부르면 대개 이런 음색들이 나온다. 내가 제이팝까지 진출한 일본의 시마우타를 주목했고 그 바탕 혹은 배경이라고 하는 우타아소비를 연결해보고자 하는 이유다.

우타아소비(歌遊び)는 무엇인가

남도 산다이 혹은 민요놀이, 민속놀이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시마우타를 낳은 어머니라고 해도 좋다. 일정한 규모로 동료들이 모이면 교환창(번갈아 가면서 부르는 노래)으로 자연스럽게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가 이야기조이기 때문에 매우 길다. 축제(마쯔리)나 축하 등의 이벤트에도 노래(시마우타)는 빠지지 않는다. 아마미(奄美)의 나제시(名瀨市) 코미나토(小湊)의 하찌가쯔오도리(八月踊)가 매우 유형적이다. 우타아소비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우이도의 홍어장수 문순득이 최초로 표류했던 지방이기도 하다. 나제시에는 작은북(치진)을 치며 시마우타를 부르는 동상들을 세워두었다. 이 지방의 상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4~5명이 북을 치면서 나온다. 점점 인원수가 많게 되면 작은 원과 큰 원을 만들게 된다. 치진(ジジン, 북)을 든 사람들이 북소리와 발동작 리듬을 맞추면서 춤을 춘다. 오키나와의 요아소비(夜遊び, 밤놀이)도 유사하다. 결혼 전 청소년들이 마음에 드는 이성과 함께 사탕수수를 짜는 맷돌 근처에서 혼숙하며 노래하는 풍속이 있었다. 음력 8월 15일 벌어지는 쥬고야아소비(十五夜遊び) 놀이판도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미혼 남녀들이 노래를 주고받으며 춤을 추는 풍속인 모아소비(毛遊び)가 전형적이다. 여자들만의 노래춤판인 우시데크(ウシデーク)와 남자들만의 노래판인 에이사(エイサー, 흔히 북춤으로 알려져 있다)등도 노래하면서 노는 놀이라는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우타아소비 범주다.

일본의 우타아소비와 한국의 강강술래

시마우타의 본산인 아마미오시마의 추석춤(八月踊)에 대한 그림이 전해온다. 나고시(名護)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는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대나무울타리에 둘러싸인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을 만들어 즐겁게 춤을 추고 있다. 여자 5명이 타이꼬(太鼓)를 치고 다른 사람들은 손짓으로 춤을 춘다. 원형진(圓形陣) 가운데는 술과 진수성찬이 차려져있고 춤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대접하는 남녀가 있다. 오키나와 본도 북부에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우시데크(우쓰타이꼬) 오도리(祭祀舞踊의 하나. 시누구, 운자미 마쯔리 후에 여성만으로 구성된 춤)와 많이 닮아있지만 남녀가 섞여있는 점이나 춤의 손사래 등으로 볼 때 아마미제도의 추석춤(八月踊)의 정경이라고 생각된다(名護市博物館紀要)” 연대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현행되는 아미마오시마 추석춤의 전신으로 해석했다. 우리의 뜀뛰기 강강술래와 매우 닮아 있다. 관련한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좌혜경은 아마미의 추석춤(八月踊)과 강강술래와의 관련성을, 나승만은 모아소비(毛遊び)와 서남해 산다이의 관련성 및 우시데크(ウシ デーク)와 에이사(エイサー)등과 강강술래와의 관련성을 주목했다. 곤노게이꼬는 강강술래와 일본전통가무와의 관련성을 분석했다. 우타가키(歌垣)와 여성중심 가무인 소우후렌(想夫戀), 그 안의 여성성 및 신맞이 의례적 성격을 보고했다. 우타가키가 한반도에서 전래된 행사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 주목할 만하다. 우타가키(歌垣)는 후대에 남녀 사랑의 와카(和歌, 일본 고유 형식의 시)를 읊게 되는 원천이 되었다.

우타아소비와 시마우타의 관계

일반적으로 시마우타는, 사미센을 든 남자 혹은 여자가 노래를 하면, 뒤나 옆에서 치진(북)을 두드리면서 받음소리를 하는 구성을 취한다. 이 형식이 우타아소비에서 왔음은 재론이 필요 없다. 마치 판소리의 창자와 고수가 한 쌍을 이루어 공연하는 것과 유사하다. 차제에 창자와 고수가 한 쌍을 이루는 판소리의 연행 격식이 어떤 장르로부터 유래하였는지 추적해보기로 하겠다. 아마미 문화권에서는 남녀가 쌍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노래를 주고받으면서 판을 이끌어 나가는 것을 ‘우타가케’라 한다. 우타가케는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 즉 ‘교 환창’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전형적인 노래 중 하나가 육조(로쿠쵸)다. 아마미오시마 우타아소비의 현장에서는 지금도 남녀가 함께 하면서 손사위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손사위에도 일정한 격식이 있으며 이를 준수하거나 모방해야한다. 로쿠쵸(六調)는 매우 빠른 노래다. 느리거나 장중한 노래들을 전면에 배치하는데 육조는 놀이를 마치는 노래다. 우타아소비는 처음 시작하는 노래와 맺는 노래가 비교적 분명하다. 마치 우리가 남도민요 메들리를 짤 때, 육자배기로 시작해서 진도아리랑으로 맺는 형식에 견줄 수 있다. 인사하는 가사가 많은 ‘아사바나부시(朝花節)’로 시작한다. 여러 곡으로 편성되는 본 곡들은 각 지역마다 특성이 있어 일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끝낼 때는 ‘와카레아사바나후시(別れ朝花節)’라는 곡을 사용한다. 치진(북)은 우리의 반고(사물악기의 북보다는 작고 소고보다는 큰 규모의 북)와 견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남도 전역 혹은 도서해안 전역에 널리 퍼져있던 악기이자 연행도구이기도 했다. 일부 농악에서 ‘반고’, ‘반구’, ‘벅구’ 등으로 호명되는 분야와 유사하다. 아시아의 반고형식의 북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만들어 소개하겠다.

시마우타교실과 민요대회를 통한 시마우타의 전승

일정하게 사람이 모이면 사미센을 꺼내 노래를 부르는 우타아소비의 난장을 통해 시마우타가 전승되어왔다. 우리의 강강술래와 산다이와는 다르게 일생의례나 명절 등의 축하 자리를 정화하는 의식의 일부로 연행되었다. 물론 강강술래의 의례적 전통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해석하기는 곤란하다. 우타아소비와 동격으로 해석 가능한 하찌가쯔오도리(추석춤)은 추석날의 의례놀이다. 아마미 사람들은 노래(우타)를 이용해 섬의 역사나 사건, 교훈 등을 대대로 전승해왔다. 마을(집락)마다 불리는 방법, 가사, 해석이 모두 달라 다양하다. 거의 모든 곡이 작사, 작곡자가 불명인 것은 우리나라의 민요와 대동소이하다. 시마우타가 노동요에서 출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시마우타 명인 츠보야마유타카(坪山豊)씨의 주장이다. 노동요이자 의례요였던 우타아소비가 시마우타로 정착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농악이 사물놀이로 정착하는 것에 비교해볼 수 있다. 과정이 흥미롭다. 서양음악이 급속하게 유입된 후 기타가 사미센을 대체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마을(시마) 사람들에 의한 우타아소비의 소비 기회가 줄어들었다. 자기의 고향에 대해 말할 기회도, 자신의 섬에 대해 노래할 기회도 감소해갔다. 1944년 아마미오시마 나제시 공민관에서 다시 시마우타 부르기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시마우타라는 현행 스타일이 고정된 듯하다. 주목할 것은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민요대회다. 시마우타 가수 등용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승한 가수는 여러 가지 축하잔치 등 이벤트에 불려나가게 된다. 지금은 신민요라 불리는 우타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수상자 중 훗날 전국 데뷔를 한 하지메치토세나 아타리코오스케 등 J-Pop 가수들은 지난번 소개해드렸다. 2011년에 내가 참여했던 가고시마대학 렉쳐콘서트의 화두는 ‘민요가 지역을 구할 수 있는가’였다. 일본의 아마미오시마,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한국의 남도소리, 프랑스의 브르타뉴, 아프리카의 잼배스쿨을 대상으로 연구자와 가수들이 모여 토론한 자리였다. 대답은 물론 ‘민요가 지역을 구할 수 있다’였다. 그 모델 삼은 것이 우타아소비와 시마우타였다.

남도인문학팁

우타아소비의 역사

시마우타는 본래 마을(시마)내에서 우타아소비(노래놀이)를 통해 전승되었다. 근대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여성들의 일터에 남성들이 사미센을 들고 나가 위로 공연하는 형식으로 잔존하기도 했다. 마쯔리에서 불리는 하찌가쯔우타는 1000년 전에 생겼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현재 많이 불리는 노래들은 아마미군도가 사쯔마번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대에 만들어졌다. 아마미오시마, 키카이지마, 도쿠노시마 세 섬에서 사탕수수(사토키비)재배에 철저하게 착취당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현재와 같은 훌륭한 시마우타가 탄생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관련 문헌이 사쯔마정부에 의해 전부 파기되었기 때문인지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시마우타가 점점 쇠퇴하다가 다시 붐을 일으키게 된 것은 철저하게 레코드 붐과 연결된다. 그 이유는 시마우타 칼럼에서 소개했다. 시마우타 레코드는 다이쇼시대(1912~1926)말에 동경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마미나 오사카에서 개인이나 일개 상점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이차대전 전후에는 나제시의 뉴그랜드사(社)와 센트럴 악기점이 본격적으로 제작과 발표에 뛰어든다. 이때의 시마우타는 독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70년 이후 일하는 여성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시마우타 독주곡을 주로 들으면서 따라 불렀다. 아마미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었던 곡은 다케시타 카즈히라씨의 레코드다. 현재도 이런 분위기는 아마미오시마 전역에 걸쳐 감지된다. 아마미오시마에서 가장 먼저 레코드를 제작한 회사의 건물이 자랑스럽게 소개되기도 한다. 나제시의 대표적인 상가에서도 레코드가게 혹은 서점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시마우타 레코드가 전시되고 진열되고 있다.

노동요로서의 시마우타(단행본, 아마미 시마우타로의 초대 중 삽화) 편집에디터
노동요로서의 시마우타(단행본, 아마미 시마우타로의 초대 중 삽화) 편집에디터
민요가 지역을 구할수 있는가라는 화두로 개최했던 2011년 포럼포스터 편집에디터
민요가 지역을 구할수 있는가라는 화두로 개최했던 2011년 포럼포스터 편집에디터
시마우타 명인 쯔보야마상과 2010년 아마미대상을 받은 고등학생 아리수양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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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우타(우타아소비)풍경-남일본신문에서 편집에디터
시마우타(우타아소비)풍경-남일본신문에서 편집에디터
시마우타의 예능화(남일본 신문 시마우타풍경 중에서) 편집에디터
시마우타의 예능화(남일본 신문 시마우타풍경 중에서) 편집에디터
아마미오시마 나제시 음반가게 정면에 배치된 시마우타 음반들 편집에디터
아마미오시마 나제시 음반가게 정면에 배치된 시마우타 음반들 편집에디터
우타아소비(남일본신문 시마우타 풍경 중에서) 편집에디터
우타아소비(남일본신문 시마우타 풍경 중에서)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