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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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철 국장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
최도철 국장 최도철 기자 [email protected]

구름 한 점 없이 쟁명한 11월 마지막 주말. 계림동 헌책방거리를 걷는데, 노란 은행잎에 자꾸 발길에 치인다.

늦가을 투명한 햇살아래 샛노랗게 물들어 빛을 발하다가, 건듯 부는 바람에 꽃비가 돼 흩뿌려진 황금조각들이다.

은행나뭇잎에 눈길을 두노라니 노랗고 예쁜 잎들만 추려 책갈피를 만들었던 어린 날 추억이 꿈인 듯 떠오른다.

이 세상의 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상나무는 은행나무라 한다. 지구의 모든 생물이 멸종됐던 빙하시대에도 살아남았고, 고생대 화석층에서도 원형의 모습이 보이는 신비한 나무이다.

실제 지리산 자락 함안 서하리에는 13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동신제를 지낸다.

은행은 한국 나무가 가장 우람하고 오래 산다. 단풍 태깔도 곱디곱다. 그에 비해 유럽 은행나무는 맑고 깨끗한 노란색이 아니라 칙칙한 구릿빛이다. 일본도 대마도나 구주(九州)처럼 한국과 가까운 땅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만 아름다운 걸 보니, 한반도가 은행 생존에 가장 적합한 땅임이 분명하다.

우리 역사에도 은행나무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고 울어대면 나라에 큰 변고가 닥친다는 강화도 전등사 은행나무도 그 하나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그 해에도, 강화 해협을 침범한 일본 군함 운양호가 포격을 가했을 때도, 강화 강제수교가 맺어진 해도 밤새 울었다 한다.

영주 순흥고을 은행나무 이야기도 흥미롭다. 수양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한다.

이후 조정은 반역고을 순흥을 지명에서 아예 없앤다. 하지만 이때부터 “은행나무가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이 복위된다.”는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퍼진다.

그 노랫말은 230여 년이 지난 숙종때 들어맞았다. 순흥골 은행나무가 절로 자라나더니 순흥의 읍호가 회복되고, 현감 신규(申奎)의 목숨을 건 상소로 단종이 복위된 것이다.

11월치를 뜯어내고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쳐다보니, 물신(物神)에라도 씌운 듯 올해도 허둥지둥 살아온 것만 같아 괜스레 헛헛하다. 이런 날이면 해남 녹우당 500년 은행나무가 편 샛노란 융단길을 걸어 고택 마루에라도 걸터앉으면 좀 나아질텐데.

최도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