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갑의 정원 이야기> 해남주조장과 일본 정원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226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해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땅끝’혹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의 가문과 녹우당(綠雨堂)을 떠올릴 것이다. 만약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흥사나 미황사를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조류(鳥類)와 생태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국내 최대의 갈대군락지이자 철새도래지인 고천암호(湖)를 말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나 축제를 접한 적이 있는 누군가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해남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신비스런 해협 울돌목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해남(海南)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따뜻한 남쪽바다를 연상하게 하고 한반도 내륙 끝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의미 있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땅끝 해남’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지역브랜드가 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땅끝 해남에서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거나 국토대장정을 출발하는 등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해남군은 전라남도 22개 시·군 가운데 면적(987.64㎢)이 가장 넓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한 때 시(市) 승격 문제를 유력하게 검토한 적도 있다. 경지면적도 전국 최대를 자랑하며 쌀, 고구마, 배추 등의 명품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고 인근 바다에서는 김, 전복, 다시마, 새우 등을 양식하여 최상의 품질을 선보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내륙의 붉은 빛 황토와 남도의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푸른 청정바다가 이루어낸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풍요롭고 평화스러운 땅에도 요모조모 둘러보면 한 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역사의 흔적도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황산면 옥매광산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군수품 원료인 명반석을 채굴했던 광산으로 국내 최대의 강제노동 동원지로 알려져 있다. 1945년 어느 날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을 태우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배에서 추자도와 보길도 중간쯤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바다로 뛰어내리게 했다. 그들 중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사람만 구해내고 나머지 조선인 118명이 그대로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 또 있는데 ‘바다의 창고’라는 뜻을 가진 바로 해창(海倉) 고을 이야기이다. 해남 해창은 1757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등장하는데 조선후기에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한양에 있는 경창(京倉)으로 운송했던 곳이다. 해창은 일제강점기에도 그 기능이 이어졌으나 해남의 농수산물이 한양으로 가는 대신 일본으로 실려나간 것이 다를 뿐이다. 해창에는 녹슨 양곡창고와 정미소, 직원숙소 등 역사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건조물들이 풀숲에 묻혀있다. 1978년 해창만 일대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목적의 포구가 여럿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관두포(館頭浦, 관머리 중국이나 제주도 가는 배를 탔던 곳), 종천포(淙川浦, 학관이 세를 받던 곳), 백야포(白也浦, 고려시대 염창 소재지), 해창(해남의 세곡 저장소), 삼촌포(三寸浦, 옛 제주기항지이자 수군기지), 용두포(龍頭浦, 고대 해창만 거점 포구), 어성포(魚成浦, 은어 장어 서식지) 등이다. 한 때 해창은 세곡수납과 조운선단을 지키기 위한 관료들이 파견되고 인부와 세곡상인들이 붐비어 한시적으로 장시(場市)가 형성되기도 했다. 여기에 고깃배는 물론이고 선박교통의 요충지로서 한 때 번성을 맛보았던 곳이다. 지금은 갯벌과 포구, 그리고 너른 바다 대신에 황금물결 출렁이는 광활한 들판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지금은 해창주조장 만이 옛 풍경을 지키고 술을 빚으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덕분에 그나마 이곳에서 과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생뚱맞거나 무색하지 않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곳이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것이라는 사실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다. 다소 변형은 되었지만 누가 봐도 일본식 가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순간 마치 일본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멋들어진 일본식정원(日本式庭園)이 있다. 일본정원 양식 가운데 하나인 ‘회유임천형(回遊林泉形) 정원이다. 이 양식의 특징은 상록수를 가득 식재하여 사시사철 푸르게 하고 그늘을 만들어 습도를 유지하여 푸른 이끼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정원의 깊이를 더해주는 수법이다. 정원 한 가운데 연못을 파고 다리를 놓고 석등을 배치하여 연못주변을 산책하며 감상하는 정원이다.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면 마치 자연을 축소하여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정원 여기저기에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현재 경영주 오씨가 정원을 정리하다 땅에 묻혀있던 빗돌 하나를 발견한 것이 있는데 바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비(誓詞碑)’이다. 이 비(碑)는 1937년 일제가 당시 조선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일종의 맹세문으로 그해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 次郞, 1874~1955)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조선인들도 황국신민이므로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을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의 치욕적이고 가슴 아픈 역사현장이지만 한편으로 뼈아픈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수 있는 생생한 체험교육장이 되고 있다. 이 정원(庭園)은 가옥의 변형에 비하면 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물론 보다 정연하게 관리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크게 변형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공간은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완성도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시대적 이야기를 얼마만큼 담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술 빚고 정원 가꾸는 일로 삶을 위로하다.

정원과 어울리는 것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차(茶)를 빼놓을 수 없다. 차를 마시기 위해 만드는 정원이 있을 정도인데 그것을 다정(茶庭)이라고 한다. 하지만 차 대신 막걸리라면 과연 어떨까? 시냇물을 끌어들여 마른 전복(鮑魚)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溝)에 물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는 경주 포석정(鮑石亭, 사적 제1호)이 떠오른다. 하지만 해남에는 오랫동안 서민들과 함께 해온 맛깔난 우리 전통주 막걸리를 만드는 곳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원이 아름다운 해남 해창주조장이다. 이곳은 비교적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는 일본정원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제법 풍경이 이채롭다. 전통주 막걸리와 일본정원은 왠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곳은 향토적 느낌이 짙게 배어 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애환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곳으로 술과 정원이 그 사실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곳은 1923년 일본인 시바타 히코헤이(柴田彦平, 1899~1985)가 정미소를 건립하고 그로부터 4년 후 본격적으로 주조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가양주(家釀酒) 형태의 술을 빚다가 1927년 공식적으로 주조장을 운영했으니, 정원과 막걸리 역사는 1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군마(群馬)현 누마타(沼田)시가 고향인 시바타는 1920년 친구와 함께 강진 성전면 월평마을로 들어왔고 1927년 이곳 해창마을로 이사했다. 그는 지금의 터에 건물을 짓고 살았는데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광주와 목포에 정미소, 해창에 미곡창고를 운영하면서 선박 3척으로 일본을 오가며 미곡상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1대 주조장 주인 시바타 히코헤이는 이웃에 사는 임산부에게 미역국을 끓여주었을 정도로 이웃주민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이웃주민들은 그에 보답하기 위해 시바타 일가의 안전한 귀국을 도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가 돌아간 후 해창주조장에는 해남 삼화초등학교 설립자 장남문씨가 거주하였으며 1961년에 주조장 면허를 취득해 운영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양조업에 종사하던 황의권씨가 주조장을 인수하여 30여 년 동안 술을 빚어왔다고 한다. 이후 2008년부터 동갑내기(1961년생) 오병인, 박리아씨 부부가 기술을 전수받아 운영해오고 있다. 오씨 부부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해 오로지 전통의 맛과 멋을 지켜가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젊은 시절 오씨는 여행을 즐겨 했는데 일본생활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전통문화와 예술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한 여행길에 해창주조장의 술맛을 보고 그 맛에 반해 택배로 배달시켜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랜 단골로 해창막걸리 예찬론자가 되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연로하신 세 번째 주인의 적극적 권유로 지금의 주조장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2013 년에는 이순신 장군과의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군 장수의 후손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조상은 이순신 장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과 인품을 가문 대대로 존경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조상이 전사한 현장 울돌목을 찾게 되었고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는 해창주조장까지 오게 된 것이다. 또 2014년에는 이 양조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바타의 두 딸이 찾아오기도 했다. 예닐곱 살에 이곳을 떠나 8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마을사람들의 친절을 기억하고 그리운 마음으로 찾아왔었다고 한다. 해창주조장은 역사적 장소로서 혹은 전통계승 차원에서의 가치도 있지만 한?일간 화해의 장소가 될 수 있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술과 정원을 매개로한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서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주인이 된 오씨 부부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술을 빚고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정원을 가꾸며 한발 한발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비록 아픔과 상처 위에 세워진 역사의 산물이지만, 자연을 아낄 줄 알고 누군가를 위로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
술(酒) 익어가는 오래된 풍경, 해남 해창주조장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