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선생 최흥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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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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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 최협 전남대 명예교수와 함께 중국 하얼빈에 간 적이 있다. 광주시와 하얼빈시의 정율성 교류 공연에 동행했다. 함께 ‘정율성 기념관’을 둘러보던 중 정율성의 가계도에서 친할아버지인 오방 최흥종(五放 崔興琮) 목사의 사진을 발견하고 최 교수가 반색했다. 오방은 정율성의 어머니의 오빠, 즉 외삼촌이었다. 정율성이 어떤 형태로든 선각자인 오방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율성은 축음기가 있는 외가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일찍 동서양 음악에 눈을 떠 중국 3대 혁명 음악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방 최흥종은 구한말인 1880년 광주 불로동에서 태어난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청년기의 오방은 일제의 앞잡이인 순검으로 활동했다. 길에 쓰러져 있는 여자 나환자를 나귀에 태워 끌고온 포사잇 선교사를 보고 그의 삶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포사잇의 희생적 사랑에 감동받아 땅 1000여 평을 포사잇 사역에 기증했다. 자신도 나환자 사역에 동참한다. 그는 뒤늦게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북문안교회의 담임목사가 된다. 광주 최초의 조선인 목사다. 1923년에는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나가 활동하다 추방된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그는 ‘나환자 근절협회’를 조직하고 나환자들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다. 나환자 500여 명과 함께 총독부를 항의 방문해 ‘소록도 갱생원’ 설립 약속을 받아냈다. 여수 애양원, 나주 호혜원 등 나환자 정착촌도 건립해 나환자들을 돌봤다. 1966년 87세로 최 목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광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이때 수많은 나환자들이 운구 행렬을 따르며 통곡을 했다.

3·1운동에 가담해 14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그는 기독인으로서 온몸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일제가 교회의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35년 항거하는 의미에서 거세 수술을 받고 ‘최흥종 사망 통지서’를 교단에 발송했다. 그는 식욕, 색욕, 물욕, 명예욕, 생명욕 등 다섯 가지 욕망을 버린다는 뜻으로 호를 오방이라고 했다. 정부는 1962년 선생의 독립 업적을 기려 애국훈장을 수여했다. 1986년과 1990년에는 각각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늘 광주 남구 양림동에 ‘오방 최흥종 기념관’이 문을 연다니 그의 애족 애국 정신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박상수 주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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