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쏟은 빗물에 무너진 ‘농심’

태풍 ‘미탁’에 직격탄 맞은 보성 겸백면 르포
20여일 사이 세차례 몰아친 태풍에 논농사 망쳐
재해보험 가입도 못한 영세 소농 재해복구 ‘막막’
마을 주택도 붕괴돼 삶의 터전 송두리째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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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호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재산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3일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한 주택에서 마을주민과 피해가족들이 산사태로 집안까지 밀려온 토사를 치우고 가재도구를 옮기는 등 복구 작업을 펼치고 있다. 나건호 기자 gunho.na@jnilbo.com
제18호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재산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3일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한 주택에서 마을주민과 피해가족들이 산사태로 집안까지 밀려온 토사를 치우고 가재도구를 옮기는 등 복구 작업을 펼치고 있다. 나건호 기자 gunho.na@jnilbo.com

 ”지난달 ‘링링’과 ‘타파’로 쓰러진 벼를 겨우 일으켜 세웠는데, ‘미탁’이 휩쓸고 가면서 벼 이삭이 모두 엉망이 됐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제 농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20여 일 사이에 세 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없었다. 쓰러진 벼와 물이 가득 고인 논밭을 바라보며 농민들은 눈물만 글썽일 뿐이다. 수확의 기쁨을 누려야 마땅한 가을, 농민들은 서럽다.

 농민들은 지난 2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태풍 ‘미탁’이 몰고 온 비바람을 뚫고 벼를 돌봤지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3일 오전 보성 겸백면에서 만난 송규영(83)씨. 길가에 멍하니 서서 물에 잠긴 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벼를 들어 올리니 나락에서는 새파란 싹이 자랐고 뿌리는 벌써 썩기 시작했다.

 그는 “태풍이 일주일만 늦게 왔어도 무사히 수확을 끝마쳤을텐데, 한해 농사를 다 망치게 생겼다”며 “누운 벼를 다시 일으켜 세워도 제값이나 받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보성군은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지난 1일부터 이틀간 288㎜가 넘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회천면 국도 18호선과 겸백면 지방도 845호선은 최대 50m가 넘는 토사가 유실돼 밤사이 복구작업에 나서야 할 정도다.

 겸백면은 지난 태풍 ‘링링’ 상륙 당시에도 피해가 막심했다. 이번 ‘미탁’으로 물에 잠긴 논에는 지난달 100여명이 넘는 인원이 합심해 벼를 일으켜 세우고 묶었던 흔적이 그대로다.

 피해가 너무 커 이젠 더는 복구작업도 의미가 없는 처지가 됐다.

 겸백면 용산1리 선점자(58) 이장은 “겸백면 일대는 마땅히 다른 상품 작물을 재배하지 않아 농민 대부분이 벼농사를 짓고 있다”며 “어렵게 출하를 한다 해도 비바람 피해를 본 벼는 시세를 인정받기 힘들다”고 한숨 지었다.

 태풍의 피해는 영세 소농들에게 더욱 타격이 컸다.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한 농민들은 그나마 일부라도 보상받을 길이 있지만, 보험료가 아까워 가입을 못한 소농들은 피해를 하소연할 곳도 없다.

 선 이장은 “마을 어르신들은 빚을 내 한해 농사를 짓고 있는 처지”라며 “겨우내 난방비가 아까워 전기장판으로 한겨울을 버티는 분들도 태반인데, 재해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한 어르신들은 보상받을 길도 막막하다”고 했다.

 벼농사 뿐만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비는 삶의 터전마저 송두리째 앗아갔다.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김인순(81)씨의 집은 폭우에 담벼락이 무너지고 비가 흘러넘쳐 하룻밤만에 모든 살림을 잃었다.

 김씨는 “오후 11시께 뒷마당에서 천둥소리가 나길래 이웃집에 손전등을 빌리러 갔다 온 사이 온 집안이 물바다가 돼 있었다”며 “밤늦은 시간이라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새벽 6시까지 혼자 바구니로 물을 푸는데 흘러들어오는 빗물이 너무 많아 아무 소용도 없었다”고 했다.

 평생 농사지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3년 전 새로 지은 집이 난장판이 됐다. 군청 공무원들이 복구작업에 나섰지만, 얼마나 살림을 건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는 “깜깜한 새벽에 빗물에 흘러내려 간 10만원을 찾으러 마을 입구까지 달려갔는데 혼자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애써 참던 그의 눈은 어느새 붉어졌다.

 이번 태풍으로 보성지역에서만 벼 침수·쓰러짐 피해는 670㏊로 잠정 집계됐다. 현장 조사·복구 작업이 본격화되면 피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김진영 기자 jinyoung.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