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이제는 학교자치의 스쿨미투를 생각하자

노영필 철학박사·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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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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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는 균형이 중요한 잣대다.

누구에게는 과잉대응하고, 누군가는 봐주는 식이라면 사람들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다. 특히 권력을 다루는 곳에서 더 그렇다. 이렇듯 무너진 균형감각이 지배논리가 된다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독재나 전제주의 사회현상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차이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담지 못하는 결핍이 여전히 심각하다. 조국 장관 압수수색을 두고 검찰총장은 “절차대로 하고 있다”지만 절차 자체가 문제라면 어떨 것인가? 검찰청 앞에 100만인파가 모여 분노를 표출한 것은 여전히 무너진 균형감각에 대한 분노다. 마찬가지 현상은 배이상헌 교사의 직위해제와 검찰고발 사건에서도 똑같다.

학생들이 불편하다는 민원제기와 성평등 수업을 진행한 교사의 목소리는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 교육행정이 한쪽만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줄 때 민주주의의 가치인 권리의 존중을 담아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교사 배이상헌 사건은 중요하다.

수업시간에 이뤄진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활동과정에서 순간순간 오해가 만들어질 수 있다. 내용을 충분히 담지 못한 앞선 이야기로, 맥락을 놓친 이야기로, 정황상 감정이 개입된 이해로, 그릇된 선입견 등으로 얼마든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교육청이 ‘교육활동과 성범죄’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 판단을 사법기관에 맡긴 것은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직무유기다. 더더욱 민주시민을 육성한다는 슬로건에 걸맞지 않는 반민주적인 집행자를 자처한 것이다. 광주시 교육청은 해당 학교의 시교권보호위원회의 개최를 외면한 채 법원에서 결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무능한 행정력의 본보기이다.

권위주의 시대에도 없었던 행정통제가 넘치고 있다.

이재남 정책국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배이상헌교사 사건을 염두에 둔 서슴지 않은 발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스쿨미투의 행정행위가 정당하다고 강변하다 철회하는 사건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펼친 이야기를 접하면서 히틀러 치하의 괴벨스가 떠올랐고 아이히만이 생각났다. 괴벨스는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말과 “거짓말을 충분히 자주 반복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 자신도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고 했다. 이재남은 행정을 움직이는 원리가 잘못됐는데도 성실하게 법집행을 했노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아이히만이 되었다.

관료주의 스쿨미투의 현주소를 반영한 말이어서 슬프다. 배이상헌 교사 사태는 세 달째가 되었지만 잘못된 조치에 대해 교육청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신문지상에서만 논란이 커지고 있다. ‘억압받는 다수’의 엘레오노르 푸리아 감독까지 참여하는 세계적인 교육 사건으로 키우고 있다. 광주시교육청의 민주주의와 성윤리 감수성 인지지수가 나쁘다는 뜻이다.

교육현장의 도처에는 배이상헌 사례와 유사한 현상이 너무 많다. 당사자인 아이들은 더 이해할 수 없어 하고, 교사들은 행정적 조치 앞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오히려 성평등교육은 수면 아래로 잠기고, 교육현장은 위축되고, 진짜 목표였던 성윤리교육은 온대간대 없다. 교육청은 시대에 맞지 않은 관료주의 행정인 정치적 셈법으로 스쿨미투를 방치하고 있다.

스쿨미투에 대한 대안적인 개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교자치의 스쿨미투가 그것이다. 이제 교육청은 배이상헌 사건을 계기로 수업의 재구성권이나 생활지도권을 무시하고 무조건 스쿨미투로 몰아감으로써 오히려 스쿨미투의 취지조차 혼돈시키고 있는 작금의 상태를 빨리 각성하고 시정해야 한다. 나아가 스쿨미투의 주체가 되어야 할 학생들을 2선으로 밀어내지 않고 전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 전교조 여성위원회가 주최한 스쿨미투 토론회에서 “교사들의 보호는 찾아볼 수 없고, 당사자인 학생들은 보호되지 않은 채 동원될 뿐 교육청 자신들만 보호하고 있다.”고 토로한 참가학생의 지적은 상징적이다.

관료주의 교육청은 민원처리만 있고, 학교자치의 책임은 없는 현실이다. 오히려 독재정치세력이 악용했던 보안법 논리를 끌어와 성보안법으로 둔갑시켜 통제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반발할 수 없도록 간첩혐의를 씌웠던 것처럼 성범죄 혐의를 씌우는 순간 사회로부터 격리될 수 있다. 그런 만행이 교육청의 역할은 아니다. 교육청의 제대로 된 역할은 교사가 안전수칙을 말했고, 자리를 지켰다면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교육에 전념하는 당신들이 수업에서 하는 발언은 면책특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럴 때 “질문이 있는 교실, 행복한 학교”가 가능할 것이다. 더불어 학교자치의 스쿨미투도 성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