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교과서에서 보던 역사현장 직접 보니 가슴 뭉클 “

광주 동구청소년 해외역사현장탐사단 동행 취재기
2일~6일, 고구려·발해 유적지 및 백두산· 여순 탐방
“광개토태왕비 한국어 설명 못들어 아쉬워 ”
여순 감옥 안중근 의사 항일 정신 오롯이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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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어떤 감정인가? 항일 운동가들이 제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려 한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실체는 무엇인가?

4박5일 내내 가슴 밑바닥에서 맴돌았던 질문이다. 책이나 매체,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던 말들로 역사를 기억하는 세대인지라 이번 동행 취재의 의미가 남달랐다.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청소년 세계 인문 지도자 양성 역사탐방’ 동행 취재를 다녀왔다. 단동 집안부터 백두산, 압록강과 여순까지 고구려·발해 그리고 일제 침략기의 역사가 깃든 동북아지역을 탐방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지역 중학생들과 학교 선생님, 재단 관계자 및 동구청 관계자들까지 총 94명이 탐방에 참여했다.

△중국 당국 광개토태왕릉비 한국어 설명 제한

중국 도착 이튿 날인 9월 3일 일행을 태운 버스가 호텔에서 출발했다. 단동에서 5시간을 달려 고구려 425년 도읍지였던 집안시(集安市)에 도착했다. 중국 길림성 최남단 국경도시인 집안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 자리했다. 집안에는 환도산성과 장군총(장수왕릉), 광개토태왕비와 왕릉 등이 보존돼 있다. 지난 2004년엔 집안 일대 고구려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광개토태왕릉은 웅장하고 장엄했다. 한 변의 길이가 66m나 되는 왕릉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광개토태왕릉비가 보존돼 있었다.

삼엄한 경비 탓에 비각 밖에서 광개토태왕릉비를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
삼엄한 경비 탓에 비각 밖에서 광개토태왕릉비를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양가람 기자 [email protected]

높이만 약 6.39m의 거대한 비석 네 면에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적혀있었다. 무게만도 37t에 이르는 비석에는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연대순으로 새겨져 있었다. 광개토태왕 사후 2년 만인 414년에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졌는데, 무자비한 탁본과 일본의 왜곡으로 비문이 훼손돼 왔다.

교과서에서나 봤던 광개토태왕릉비를 눈 앞에서 본 학생들은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무척 아쉽게도 방탄유리로 된 중국식 비각 안에서는 역사적 보물을 촬영할 수 없었다. 통 유리를 사이에 두고서야 비석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더 큰 아쉬움은 따로 있었다. 한·중 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갈등으로 고구려시기 유적에 관한 한국어 설명이 제한됐는데, 오는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을 앞두고 감시가 더욱 강화됐다. 특히 광개토태왕릉비 앞에서는 한국어로 쓰인 플래카드를 드는 것은 물론 동영상 촬영도 엄격히 금지됐다. 탐방단은 아쉬움에 카메라 셔터만 연신 눌러냈다.

박현웅(조대부중2) “책에 소개가 되긴 했지만 크기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그 크기와 웅장함에 압도되는 것 같다”며 “다만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되고 이렇게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역사를 인정하고 서로의 문화를 인정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두산 천지 , 압록강 여객선 투어 통일 염원 저절로

3일 차 일정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다. 올해부터 백두산 입장권 구입 후 한 시간 내에 입장해야 하는 규정 탓에 서둘러 백두산으로 향했다. ‘長白山’이라 적힌 중간 환승장에 도착한 후에도 버스를 두어 번 더 갈아탔다. 비포장 도로를 끝없이 달리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일행 모두 백두산 천지를 보게 해 달라 간절히 기도했다.

“백 번 와서 (천지를) 두 번 밖에 못보니 백두산”이라는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처럼, 백두산의 날씨는 변덕 그 자체다. 천지를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맑다가도 금방 폭풍우가 휘몰아치기도 한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서백두산 턱밑에 도착해 1400여개의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날씨에 대한 조바심이 컸다. 하지만 쉼 없이 오르다보니 뿌옇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탁 트인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맑은 날씨 덕에 천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탐방단은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
맑은 날씨 덕에 천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탐방단은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양가람 기자 [email protected]

천지에 1등으로 올라 온 서지민(조대여중1) 양은 “오는 동안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천지만 생각하고 꾹 참았다. 한 번에 천지를 볼 수 있게 되다니, 아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화창한 날씨 덕에 천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학생들은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그간의 고생과 피로를 날렸다. 한 쪽에 서 있는 37호 경계비를 바라보면서는 통일에 대한 염원도 했다. 경계비 너머 북녘하늘을 바라보던 학생들의 눈에서는 중국 땅을 거쳐야만 천지에 닿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가득 했다.

다음 날, 탐사단을 태운 버스가 단동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단동은 북한 신의주와 국경으로 연접한 지역이다. 원래 명칭은 안동(安東)으로, 압록강을 기준으로 ‘동쪽에서(東) 가장 화려한(丹) 도시’라는 뜻에서 단동이라 불렸다.

오전 11시 탐사단은 압록강변에서 유람선을 탔다. 갑판 위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던 학생들이 잠시 후 소리를 질렀다. 반대편엔 북한이 있었다.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여성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선생님, 저기가 북한이에요? 북한 사람한테 말걸면 어떻게 돼요? 붙잡혀 가나요?”

이것 저것 질문을 던지던 학생들은 북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골 풍경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모습에 어떤 학생들은 속상해했고, 어떤 학생들은 통일이 빨리 되길 기도했다.

서찬미(충장중1) 양은 “TV를 통해 탈북자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담긴 북한만 접했는데, 실제 본 북한은 오래된 시골 동네 같은 느낌이다. 하루 빨리 통일이 돼서 남한에서 바로 북한을 갈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 5일 압록강 단교 앞에서 탐사단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
지난 9월 5일 압록강 단교 앞에서 탐사단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양가람 기자 [email protected]

다시 40여분을 달려 압록강 단교(斷橋)에 도착했다. 6‧25 당시 중공군 선봉대가 건너던 다리가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져 중국쪽 교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압록강 단교 위에서 바라본 중국(단동)과 북한은 극명하게 대비됐다. 학생들은 단교 위 전시된 역사적 기록물을 살펴보며 슬픈 역사의 기억을 더듬었다.

△여순에서 안중근 의사 발자취 체험

4박 5일 여행의 마지막 날, 탐사단은 여순으로 향했다. 여순은 여순 감옥과 관동법원 등 근현대사의 아픔이 간직된 곳이다. 수많은 중국 항일지사들과 한국의 안중근 의사가 관동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여순 관동법원 내 고문실에는 일제가 중국 침략시기 감옥, 경찰서에서 사용했던 고문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
여순 관동법원 내 고문실에는 일제가 중국 침략시기 감옥, 경찰서에서 사용했던 고문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양가람 기자 [email protected]

불공정한 재판이 이뤄진 관동법원 내부엔 당시의 역사적 기록이 전시돼 있었다. 학생들은 고문실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고문실 안에는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온갖 고문기구들이 걸려있었다. 시체를 갈아없앤 쇄신구부터 사람 가죽을 벗기는 도구 등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고문 도구를 본 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여순 관동법원 내 고등법원법정에서 탐방단 90여명이 안중근의사와 관련된 영상물을 감상하고 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
여순 관동법원 내 고등법원법정에서 탐방단 90여명이 안중근의사와 관련된 영상물을 감상하고 있다. 양가람 기자 [email protected]

이어 대법정에서 안중근 의사 관련 동영상을 시청했다. 한국어로 제작된 짧은 비디오물엔 안중근 의사의 항일 투쟁과 순국 과정이 담겼다. 여운이 많이 남았는지 영상이 끝난 뒤에도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박현서(운림중1) 군은 “아직까지 역사적 장소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 놀랬다. 내가 당시를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더욱 안중근 의사같은 결단이 쉽지 않을 거 같다. 그래서 더 안중근 의사가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방문한 여순감옥에서 탐방단의 침묵은 더욱 무겁고 길어졌다. 먼지 자욱한 긴 통로 옆으로 좁은 감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세 평 남짓한 방 안에 8명 가까이 수감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사형집행장 가는 길목에선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다신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걸으면서, 좁고 음침한 감방에선 상상할 수 없는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면서 사형수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애석하게도 감옥에서 사형집행장까지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다. 사형수들은 한 평도 되지 않는 집행대기실에서 본인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 생을 정리했다. 7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형집행장은 생각보다 작았고, 그래서 더 참혹했다. 무자비한 현장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탐사단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장소에 이르러 참아온 슬픔을 터트렸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음에도 가셨습니다. 그 결단이 있으셨기에 지금이 있습니다.”

여순 감옥을 찾은 동구 지역 중학생 세 명이 안중근 의사 영정 앞에 헌화를 하고 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
여순 감옥을 찾은 동구 지역 중학생 세 명이 안중근 의사 영정 앞에 헌화를 하고 있다. 양가람 기자 [email protected]

가이드의 짧은 설명이 끝나고 일행은 다함께 묵념을 했다. 학생 서너명이 안중근 의사의 영정 앞에 미리 준비해 온 꽃다발을 놓았다. 헌화하는 학생들의 손이 가늘게 떨렸고, 옆에 있던 무등중 선생님이 참아온 눈물을 흘렸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 학생들은 비극의 현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느낀 점 등을 공유하며 친일파 등 아직 청산되지 못한 현재를 일깨워줬다.

문선화 누리문화재단 실장은 “같은 항일 운동가 임에도 이북 출신은 우리 기억 속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 통일과도 연결되는 문제”라며 “정말이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첫 해외 탐방 공과 정리 2차 탐방 계획 수립

동구는 지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첫 해외역사탐방인 만큼 프로그램 하나 하나에 신경을 썼다. 그만큼 학생은 물론 인솔교사, 그리고 재단 관계자들 모두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다.

하태용 살레시오여중 교사는 “학생들이 외국에 와서 직접 역사의 현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힘든 일정을 잘 소화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안전사고를 대비해 동구청 소속 의료담당자도 탐방에 동행했다. 다행히 응급상황은 발생하지 않았고, 준비해 간 멀미약만 동났다.

버스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 체력적으로 힘들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담당 가이드는 학생들의 체력이 고려된, 시간을 가장 절약할 수 있는 코스였다고 답했다.

탐방단 모두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무사히 귀국했다. 오는 21일 마무리 교육과 탐방 보고서 발표가 진행된다. 또 해외 탐방의 공과를 정리해 2차 해외 탐방 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글·사진=양가람 기자

양가람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