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교훈은 개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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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봉 기자 gbkim@jnilbo.com
김기봉 기자 [email protected]

징비록(懲毖錄)을 남긴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은 조선이 처참한 전란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근본적인 사회구조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크게 요약하면 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임,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 구현과 천민도 평민이 될 수 있도록 계층 이동 사다리를 강화하는 방안이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악법과 그 폐해의 민낯을 봤다. 대표적인 게 군역(軍役·병역)의 폐단이다. 조선 개국 땐 양반도 병역 의무가 있었지만 조카를 끌어내리고 집권한 세조가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양반들이 병역 의무를 회피하는 것을 묵인했다. 중종 때는 포(布·옷감)를 내고 병역의무를 대신하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시행했는데, 양반들은 그 마저도 면제받았다. 또 다른 악법이 양반과 여종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어미의 신분에 따라 노비가 되는 ‘종모법'(從母法)이다. 조선 초기엔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을 시행했지만 노비가 줄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양반들의 저항에 부딪혀 종모법으로 회귀하고 만다. 양반들은 의무는 지지 않고 노비만 크게 불렸다.

전란이 발생하자 기득권 보호에만 골몰했던 양반들은 달아나기 급급했다. 평민과 노비는 왜군의 칼날에 무참히 희생되거나 일본군에 가담해 목숨을 부지했다. 류성룡은 전란 극복을 위해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다. 천민이 참전하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양반들이 돌변했다. 신분제의 근본 틀을 흔들었다고 류성룡을 탄핵했고 개혁 입법을 모두 폐기했다. 조선은 다시 철옹성 같은 양반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나라가 됐고 평민과 천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로부터 300년 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류성룡의 개혁 입법이 폐기되지 않고 조정 대신들이 징비록을 머리맡에 두고 탐독했다면 조선은 망국의 비운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징비록의 교훈을 구현하려 노력한 반면 구한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은 류성룡을 탄핵한 서인의 후예인 노론이었다는 점이다. 최근 일본의 경제도발 이후 온 국민이 한 목소리로 극일(克日)을 외치고 있다. 목소리를 높이되 대한민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우리 내부의 폐단이 뭔지도 차분하게 따져봐야 할 때이다.

김기봉 디지털뉴스국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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