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가요와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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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진도의 어느 마을 노래판, 이토아비토 촬영 편집에디터
1973년 5월. 진도의 어느 마을 노래판, 이토아비토 촬영 편집에디터

민요(民謠)라는 용어는 언제 생겼나

한자어 ‘민요(民謠)’는 성종실록에 한 차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민요’보다 ‘민속가요’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세종실록, 성종실록, 중종실록, 명종실록, 효종실록에 각 1회씩 5회 출현한다. 지배 권력을 갖지 못한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를 지칭하는 개념어는 민요가 아닌 ‘이요(俚謠)’였다. 속된 노래라는 뜻을 갖는 ‘이요’는 한자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글로 지어 부른 노래를 지칭하는 말이라 해석된다. 배인교가 ‘일제강점기 민요의 개념사적 검토’라는 논문에서 자세하게 논의해 두었다. ‘민속가요’를 굳이 분해하여 해명해본다면 속가 혹은 민요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요’로 호명되던 노래가 어찌 민요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 선학들, 이구동성으로 주장한 바는 1920년대 민요의 발견 혹은 재발견이다. 아니면 태동일 수 있다.

노래 일반을 말하던 ‘가요’에서 민족, 민중을 기반 삼는 ‘민요’로

민족과 민중이란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이 용어의 남상 혹은 태동은 가요와의 병립 속에서 추적해야만 한다. 20세기 초 계몽의 시대를 거치며 종묘에 쓰이는 의례용 음악에서부터 여자 기생들의 노래와 민간의 노래를 두루 일컫던 명칭은 ‘가요’다. 예를 들어 고려민요라고 하지 않고 고려가요라 한다. 임경화는 그의 논문 ·민족에서 인민으로 가는 길: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의 보편과 특수?에서 가요와 민요의 분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호명은 점차 서민예술에 기반한 전통적 노래 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요를 ‘민풍(민속의 풍정)’의 차원에서 접근했던 시기였다. 이 때의 가요에 대한 생각은 ‘풍(風)’의 요체를 민속가요의 시 혹은 여항의 노래에서 기원한 노래로 규정한 ‘시경’이래의 전통이다. 주지하듯이 ‘시경’의 50% 이상이 ‘풍(風)’이라는 민요다. ‘민요’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긴 하지만 사실상 새로 발명된 용어다. 민속, 민예, 민중 등 1900년대 초반 수입된 용어들을 일본어를 거쳐 번역했다. ‘Volkslied’의 번역어가 민요인데 두 가지 뜻이 있다. 타민족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노래’라는 의미가 첫째요, 문명의 상징인 문자를 향유해온 특권계층에 대해 구술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피지배 계층으로서의 ‘민중의 노래’라는 의미가 두 번째다. 일본어의 번역어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어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이 용어는 당초부터 지방성이나 계급성, 문화적 차이가 민족으로 수렴되는 ‘민족의 노래=민중의 노래’로 일원적으로 파악되었다. 적어도 민요의 자장 안에서는 민족과 민중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가요에서 K-pop, 힙합의 랩까지

박애경도 그의 글 ‘가요 개념의 근대화, 식민화, 혼종화’에서 가요의 분화와 민요의 발생, 나아가 k-pop으로의 확산을 주목하고 있다. 근대기를 거치며 점차 가요와 민간 생활에 기반한 민요가 ‘민족의 노래’로 분리되었다. 반면에 가요는 ‘유행가요’라는 의미로 안착된다. 식민시기 말기 파시즘 체제를 거치며 가요는 신체제 정책에 복무하는 ‘신가요’, 혹은 ‘가요곡’이라 호명된다. 더불어 식민화의 혐의를 받게 된다. 신가요는 해방 이후 가치중립적인 말로 쓰이기도 했으나 대중사회의 성장과 함께 점차 ‘가요=대중가요’라는 등호관계가 굳어지게 되었다. 문화가 국경을 넘어 수용되는 요즘에는 K-pop이 가요의 하위범주로 부상했다. 세계로 발신하는 한국의 노래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민요라는 용어가 채택된 이후까지 민요는 보다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배인교의 연구를 다시 인용한다. 이시카와 기이치의 ‘조선민요’, 동아일보 1924년 10월 31일자 정보다. 조선 민요의 범주를 세 가지 정도로 잡고 있다. 첫째, 조선의 옛 음악 중 속악으로부터 변한 민요 즉 시조를 포함한다. 둘째, 예부터 전하여 오는 민요로 단가와 잡가도 포함한다. 세 번째, 지방의 민요를 포괄하는데 이는 단가, 잡가에 조금씩 지방색을 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 판소리 단가, 시조 등을 포함한 매우 포괄적인 용어였음을 알 수 있다. ‘가요’와 ‘민요’가 혼용되었던 과도기라고나 할까. 어쨌든 ‘가요’로 통칭되었던 노래가 ‘대중가요’와 ‘민요’로 분화된 후 1세기를 훌쩍 지나왔다. 이제 민족을 담보한다던 전통적인 의미의 민요는 국가나 지방이 강제하는 방식의 보존 외에는 거의 소멸단계인 듯하다. 반면에 대중가요는 K-pop에서 힙합의 랩까지 폭풍 성장하고 있다. 민요는 정녕 소멸해버린 것일까.

고안된 신민요, 갇힌 과거를 넘어섰을까

민요라는 호명이 전제하는 개념은 민족과 민중이었다. 삼일운동 이후인 1920년대부터 민요가 ‘민족의 노래’로 정립되면서 가요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전대 ‘가요’ 혹은 ‘동요’로 불리던 ‘수심가’나 타령류의 노래들이 ‘민요’로 호명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판’과 ‘개량’의 대상이었던 노래들이 지식인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선별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가요와 민요의 분리가 일어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민족이란 개념의 민요 전유에 있을 것이다. 수입 민속학이 초창기 발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다. 이후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통용되던 ‘가요’는 근대적 의미의 ‘유행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박애경은, ‘민요’라는 양식으로 정립된 전대의 가요가 당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유행가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행간을 잘 분석하고 있다. 가요라는 호명은 발흥하고 민요라는 호명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민요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신민요 발생은 이로부터 발생하게 되었다. 양지영은 그의 글 ?신민요를 통해 본 조선적인 것-노구치 우조, 조선민요의 연구, 김사엽을 중심으로?에서 관련 정보를 자세하게 분석해두었다. 과거에 갇힌 민요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현재라는 역사성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 가변하는 ‘조선적인 것’이 내포한 전통성을 잇는 매개체가 신민요였다고 주장했다. 신민요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민족의 노래로 대표되는 민요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조선적인 것’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전통성과 역사성을 되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소영은 ‘식민지 근대의 잡가와 민요’라는 글에서 민요라는 용어와 그 개념 전개가 근대적인 시선의 개입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전래된 노래로서의 제반 전통가요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식민지 근대라는 맥락 속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근대의 표상으로서 잡가로 인식되었던 통속 민요가 민요라는 용어를 부여받고 음향적으로나 가사적 차원에서 재구성된 것은 식민지 근대라는 자장위에 근대적인 담론 체계가 작용한 문화변용이라고 분석했다. 민족 혹은 민중담론에 갇히면서 신민요로 출구를 열었으나 남한에서는 유행가요의 그늘에 다시 갇혀버렸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담보하는 신민요 곧 창작곡을 취하면서 오늘날 많은 민요들을 연행하고 있다.

민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조영배는 민요가 과거의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해석학적 민요 이해에 대한 견해라는 단서를 달았다. 과거의 어떤 것이 끊임없이 생동하여 지금까지 이어진, 그리고 앞으로도 생동하며 발전할 노래들이 민요라는 것이다. 민요의 발전과 변화과정을 이처럼 해석학적으로 이해한다면 과거의 ‘비의도적인 변화’라는 틀로 민요를 한정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민요를 ‘전유(專有)’로서의 노래’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전유를 이렇게 풀어두었다.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식민지에서 제국의 문화를 수용한 후, 그것을 지배자에게 저항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로 방송하는 라디오를 받아들여 민족 해방 운동의 도구로 사용한 알제리의 민족 해방 운동이 그것이다. 조영배는 그의 글 ?한국민요학의 발전을 위한 해석학적 방향모색, 가다머, 리쾨르, 김형효의 전통문화 이해 방법론을 통하여?라는 글에서 ‘의도적인 변화와 창출’ 곧 전유 과정으로서의 민요를 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삼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생동하는 것이 민요라는 역설이다. 어쩐지 공허한 말놀음 같다. 선학들의 논의를 빌리니 한 가지는 명료해진다. 입으로는 민요의 개방성과 지속성을 말하긴 하나, 정작 민족이나 종족 혹은 지방이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해둔 민요는 망실되거나 아사 직전이라는 점. 과거에 갇힌 것이 아니라 강변하는데도 전통이라는 이름의 과거에 갇힌 노래였고 미래로 개방되었다 하면서도 지역의 율격을 따져 변별하거나 배제해왔다는 점.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 것인가. 해답을 제시할 사람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두는 것은, 탈근대, 초국가의 시대, 그러면서도 지역자치와 지역분권을 모토 삼는 시대의 민요 향방이다. 아마도 그것은 더욱 더 지역성을 공고히 하되 가요의 세계까지 영역을 넓혀두는 장르 개방 혹은 장르 통합에 있을 것이다.

남도인문학팁

남일본 아마미오시마 시마우타의 사례

시마우타는 전통적인 우타아소비를 통해 보존 전승해 왔다. 우리 남도지역의 산다이 정도 될 것이다. 우타샤(歌者)라고 하는 노래 전문가가 존재했다. 우리의 잡가소리꾼에 해당될 것이다. 우타아소비 뿐만이 아니라 실제는 하쯔가쯔 오도리(추석의례)를 통해서 전통과 전승이 확산되어 왔다. 시마우타라는 호명방식은 민요의 하위범주로 인식되는 장르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섬이라는 지역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노래하는 방식은 매우 즉흥적이다. 처음 시작하는 노래와 마지막 마치는 노래가 정해져 있는 정도다. 조직적인 발전의 경로를 가진다. 섬지역의 고립과 고독, 억울함, 슬픔 등을 담아내던 노래의 정서가 현대 일본인들에게 공유되고 인정되고 있는 셈이다. 악기가 사미센과 치진(북)으로 고정화되었다. 우리의 판소리와 소리북 구성에 비유할 수 있다. 전승은 공민관이나 개별적인 시마우타 교실을 통해 거의 모든 공교육에서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보전 전승이 효율적이다. 아마미오시마 시마우타라는 독특한 목청과 음색이 그들의 정체성이다. J-pop으로 진출한 하지메치토세 같은 가수를 시마우타 가수라 호명한다. 지역적 특성을 살려 노래하기 때문이다. 대중성과 정체성의 조율. 여기 해당되는 K-pop 대중가수가 있을까. 시마우타를 통해 모토 재팬을 주장하는 것처럼 ‘더욱 더 한국’을 노래하는 대중 민요 말이다.

1973ㄴ녀 5월. 진도의 어느 마을 노래판, 이토아비토 촬영 편집에디터
1973ㄴ녀 5월. 진도의 어느 마을 노래판, 이토아비토 촬영 편집에디터
해남 우수영 부녀노동요 시연. 2019. 6. 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해남 우수영 부녀노동요 시연. 2019. 6. 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해남 우수영 부녀노동요 시연. 2019년 6월. 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해남 우수영 부녀노동요 시연. 2019년 6월. 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해남 우수영 부녀노동요 시연. 2019년 6월. 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해남 우수영 부녀노동요 시연. 2019년 6월. 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