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홍범도 봉오동’에 한국 독립군이 없다

댐으로 변한 전투현장… 접근하기 어려운 기념비
붉은 천으로 비문 가리고 홍범도·김좌진 지우기
중국 독립운동사 왜곡 국가보훈처가 바로 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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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교육연수원 항일연수단이 6일 중국 도문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전적지를 방문했으나 입장이 불허됐다. 편집에디터
광주시교육연수원 항일연수단이 6일 중국 도문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전적지를 방문했으나 입장이 불허됐다. 편집에디터

내년 2010년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승리한 봉오동(1920년 6월)·청산리대첩(1920년 10월)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군을 제압한 100년 전 봉오동에서의 ‘독립전쟁’은 최근 일본의 ‘한국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라는 ‘경제 전쟁’의 선포시점과 맞물려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7일 개봉되는 영화 ‘봉오동전투’가 또 기대되는 이유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봉오동 전투의 출발도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에서 시작되었다. 6월 4일, 30여명의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일본 강양동(江陽洞) 초소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귀환하자, 이에 일제는 니이미(新美)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이들 부대는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살육했는데,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방 요지에 잠복했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다시 격파했다. 이에 함경남도 나남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6월 7일 독립군 토벌을 위해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의 인솔하에 ‘월강(越江) 추격대’를 편성,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 월강추격대를 봉오골로 유인,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들이 홍범도의 ‘발사’ 명령을 시작으로 3면에서 집중사격을 퍼부어 대승을 거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인 반면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으로 발표한다.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오늘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지는 댐으로 변해 있어 전투현장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댐이 건설된 일대가 하촌이고, 우뚝 솟은 초모정자산과 그 반대쪽 고개인 고려령 아래에 중촌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상촌은 댐 상류 산 밑이었다.

댐 아래, 봉오동저수지라 붙은 대문을 통과하면 1993년 6월 7일 건립된 ‘봉오골 반일 전적지’라 새긴 기념비가 댐 아래 서 있다. 그런데 2013년 도문시 인민정부는 이전 기념비보다 훨씬 큰 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기념비를 보기 위해서는 봉오동 저수지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가 볼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들어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2018년부터 들어가 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더니, 오늘 광주교육청 연수팀들은 아예 입구부터 출입이 금지되었다. 봉오동 전투 현장을 보기 위해 광주에서 달려왔는데,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다.

중국은 왜 한국인들의 봉오동 전투 현장을 봉쇄할까? 2018년, ‘봉오동 전적지비’의 비문을 붉은 천으로 가리더니, 최근에는 아예 “홍범도를 사령으로……이 맹격전에서 일군 150여명을 사살하고……”라고 새긴 비문마저 지워버렸다. 오늘 봉오동에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가 없었다. 만주독립운동사에 홍범도와 김좌진을 지우고 동북항일연군을 중심으로 삼기 위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아닌지 의심된다. 중국의 독립운동사 왜곡 및 한국인 현장 접근 불허라는 현실을 국가보훈처는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년 2020년은 한국 독립전쟁사상 최초, 최대인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다. 봉오동·청산리 현장을 찾아 독립군들의 독립혼을 기리는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질 텐데, 그때마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할까? 안타깝다.

중국 도문=노성태(국제고등학교 수석교사/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