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괄 콘텐츠 디렉터 김홍탁의 ‘인사이트’>정의와 사심의 양날을 가진 폴리티컬 코렉트니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로 정의로움을 재단하는 사회로 이미 진입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의 가면을 쓰고 호도하는 것을 경계해야
심장에서 솟는 정의감을 따르는 사회가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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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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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가 사실을 바탕으로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쓴 것은 1949년이었다. 당시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대인의 집단 학살을 목도하면서, 인간의 야수성에 몸서리 치던 시대였다. 도대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하던 시대였기에 자연스럽게 실존주의가 철학과 문학의 큰 흐름을 형성했다. 이 작품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테러리스트들이 세르게이 대공을 암살하려는 상황이 전개된다. 대공이 탄 마차가 지나가는 위치와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몇 달간 모의 연습을 통해 거사를 성공시키려는 굳은 의지를 다진 그들. 그러나 거사 당일, 폭탄을 던지려던 이반 칼리야예프는 대공의 나이 어린 조카 두 명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임무를 포기한다. 내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테러가 난무하는 이 시대, 드론이 쏴주는 영상좌표를 보면서 인간을 개미떼라 생각하며 폭탄을 날리는 몰정의의 아수라를 목도하면서 나는 또 ‘정의의 사람들’을 떠올렸었다.

극혐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혐오란 말로도 모자라 극혐이란 표현을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단 사실이 소름끼치고 슬프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측면에서 대한민국은 양극화에 치닫고 있다. 협치는 찾아볼 수도 없고,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진영 싸움에 365일을 갖다 바친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국민은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끊임없이 마녀 사냥감을 찾아 기둥에 매단다. 가짜뉴스는 자가증식하고, 사람들은 소파에 누워 비방의 댓글을 달며 손가락으로 정의를 구현하기라도 하는 듯 영웅 행세를 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를 혐오하는 상황에 처한 것일까?

생각해 보니 국민 모두 정의감에 불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의감이 ‘정의의 사람들’에 나오는 주인공의 것 처럼 잡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도 백퍼센트의 정의일까 라는 생각엔 동의하기 힘들다. 자기 진영의 정당성을 증폭시키는 정치적 목적이 담긴 정의감이다. 이 시대의 핵심 화두인 ‘폴리티컬 코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 의 정의감이다. 흔히 ‘정치적 올바름’으로 번역되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말의 표현이나 행위에서, 인종·민족·종족·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확장돼 이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포괄적 용어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옳고 바른 일을 하는 데 굳이 정치적이란 음흉한 단어를 덧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니그로’라 부르던 흑인을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바꿔 부른다 해서 그들에 대한 백인의 뿌리 깊은 멸시의 감정이 없어지는 것일까? 지금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백인 경찰의 무차별 흑인 구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마디로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겉으론 근사해 보이지만, 속으로 꿍꿍이를 안고 있는 표현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정치,노사,젠더,교육 갈등의 기저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가 자리한다. 정의감은 인간 본성에 자리한 선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 정의감이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의 옷을 입을 때는, 올바름(correctness)을 정치적(political)으로 이용하는 프로파갠다로 변질되기 쉽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가 정치적 프레임으로 도용되는 것이다.

며칠 전 상하이 유대인 박물관(Shanghai Jewish Refugees Museum)에 다녀왔다. 1930,40년대에 무려 14,000여명의 유대인 난민들이 상하이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로 치자면, 부산에 유대인 게토가 있었단 얘기다. 그들은 배를 타고 인도양을 가로지르거나 기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해 상하이에 몰려들었다. 험난하고 두려운 여정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2018년, 제주도에 500여명의 예멘 난민이 몰려 왔다. OECD 국가인 우리는 대처할 마땅한 매뉴얼이 없었기에 체류의 정당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 중이었고 중국이 일본에 점령당했던 시기에, 같은 화교도 아닌 하등의 연관성도 없는 유대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상하이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너무 너무 놀라웠다. 중국 정부는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당시 ‘생명을 구하기 위한 비자( Visas for Life)’라는 이슈를 제기하며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비엔나 총영사 호펭샨(何風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가 아마도 ‘정의의 사람들’에 나오는 주인공의 심장을 가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자신의 처세에 정치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를 이행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애로 끓어 오른 순수한 정의감이었을 것이다.

그런 순수한 정의감이 그립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 군부독재 시대의 민주화 운동, IMF 경제위기 때의 금모으기 운동은 적어도 순수한 정의감의 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더욱 급증한 광화문 광장의 각종 집단 시위, 국민들의 감정소모만 가져오는 오로지 이슈 부각 용도의 탐사보도, 상대 진영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목울대를 세우는 유튜브 방송은 모두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를 추구하는 의사표시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한 정치적 의사표시인지, 자기 진영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셈법의 표출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당사자들이 절대 후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별없고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폴리티컬 코렉트니스가 구현돼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선진 국가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의 관점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심지어 법으로 처벌한다. 그러나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권력집단 때문에 문제는 발생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옳지 못한 정치(incorrect politics)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정치적이란 수식어가 붙은 모든 행위는 공명정대함과 사익추구라는 양면을 갖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경우는 사익추구를 위해 공명정대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렇기에, 도덕적 관점에서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정치적 부패(political corruption)보다 더 간교하다.

한마디로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의도된 정치적 생각과 행동이다. 그러나 정의감은 그냥 심장에서 튀어나온다. 심장을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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