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갑의 정원 이야기> 세계유산이 된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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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로부터 공인된 호남 최대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사적 제242호)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았다. 편집에디터
국가로부터 공인된 호남 최대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사적 제242호)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았다. 편집에디터

소통과 포용의 힘, 필암서원에서 배우다.

국가로부터 공인된 호남 최대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사적 제242호)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았다. 지난 7월 6일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의 수도 바쿠(Baku)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필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필암서원은 1590년 호남유림이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의 학문적 업적 등을 추모하기 위해 황룡면 기산리에 사당(祠堂)을 건립해 위패를 모시면서 시작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24년에 복원하였으며, 1662년 지방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서원 이름을 ‘필암(筆巖)’으로 지은 것은 김인후의 고향인 맥동마을 입구에 있는 ‘붓처럼 생긴 바위’에서 착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1672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고, 1786년에는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1532~1594)을 추가로 배향(配享)하였다. 현재 서원의 기능은 주로 선현의 뜻을 기리고 제사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 강학기능과 인적 교류 등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 초기에는 인재를 키우고 유교적 향촌질서를 유지하며, 시정을 비판하는 역할도 하였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혈연, 지연, 학파, 당파 등과 연계되면서 서원 수도 급격하게 늘어났을 뿐 아니라 원래의 설립취지에서도 벗어나 적지 않은 폐단이 발생했다. 이에 1871년 흥선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렸는데 필암서원은 당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호남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공간배치는 여느 서원과 크게 다르지 않게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두고, 제사 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담소나 토론 혹은 주변경관을 조망하며 쉼을 즐겼던 확연루(廓然樓)를 시작으로 강의가 이루어졌던 청절당(淸節堂), 그 뒤편에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진덕재(進德齋)와 숭의재(崇義齋)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김인후와 양자징을 배향하는 사당 우동사(祐東祠)가 배치되어 있다. ‘우동'(祐東)의 의미는 ‘하늘의 도움(祐)으로 인하여 동방에 태어난 이가 하서이다’는 뜻이다. 편액(扁額)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원의 공간구조는 엄격한 절제와 개방감을 적절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은 단연 확연루이다. 만약 필암서원에 ‘확연루(廓然樓)’가 없었다면 이곳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또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건물 앞에서 인증 샷을 찍는다. 뿐만 아니라 2층 누각에 걸린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의 ‘확연루(廓然樓)’ 편액에도 눈길을 빼앗긴다. 장중한 글씨체도 그렇지만 누각이름도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 편액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의 글씨인데 그의 강직한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물론 김인후라는 걸출한 인물과 서원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감안하면 그저 건물이 어떻고 풍경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부질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필암서원에서 확연루의 존재감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울러 서원에 왜 2층 누각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곳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는 로망을 가지고 있다. 굳이 바벨탑까지 소환하지 않더라도 파리 에펠탑을 비롯해서 세계 유수의 도시에는 그 도시를 상징하는 탑(Tower)이 세워져 있다. 반드시 탑이 아니더라도 상업건물이나 아파트 등의 초고층화가 이루어지면서 강조되는 것이 다름 아닌 ‘조망권’이다. 그들이 말하는 일명 ‘조망권’은 터무니없이 부동산 가치를 올리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진정한 조망(眺望)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확연루에 오르면 안쪽으로는 강당건물인 ‘청절당(淸節堂)’을 비롯하여 생활공간이 보이고 바깥쪽으로는 근경(近景)과 원경(遠景)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평소 자신의 눈높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다. 시점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들 또한 달라진다는 평범한 진리가 여기에 숨어 있다. 확연루의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온 말로, ‘거리낌 없이 넓게 탁 트여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 없이 공평한 성인(聖人)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누각이름을 지은 연유를 기록한 ‘확연루기(廓然樓記)’에 의하면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 했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해 확연하며 크게 공정하므로’ 우암 송시열은 특별히 ‘확연’이란 두 글자를 택했다고 한다. 시점(視點) 혹은 관점(觀點)을 바꾸는 일, 요컨대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우리가 배워야할 소중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확연루는 필암서원의 얼굴로서의 풍경적 가치와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배려와 포용의 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화정(百花亭)을 비롯한 우리주변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누정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중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던 성리학에 기반을 둔 당시 지식인들의 학문적 성향을 감안하면 그나마 자연과 삶을 관조하며 우리 실정에 맞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가치를 찾고자 노력한 지식인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당시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 간에는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고 김인후는 그 정점에 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필암서원에 김인후와 함께 배향된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梁子徵,1523~1594)의 부친 양산보(梁山甫, 1503~1557)와 소쇄원에서의 교류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인후는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순에서 유배생활하던 스승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1483~1536)를 찾거나 화순적벽 송정순(宋庭筍,1521~1584)의 물염정(勿染亭)에 들러 교분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침 그 중간에 소쇄원이 있어 오고가는 도중에 반드시 들러 차 한 잔이라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548년 어느 여름날 소쇄원에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1501~1572)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풍광을 노래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쇄원 제월당에 제액으로 걸려 있는 그 유명한 ‘소쇄원48영’이다. 이 풍경은 1755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에 오롯이 담겨있다. 김인후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했으며 풍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중시하고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호남정신의 든든한 토대가 되고 있다.

온갖 들꽃으로 가득한 백화정에서 자연가(自然歌)를 읊다.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193번지, 바로 김인후가 태어났던 생가 터이다. 이곳에 생가는 볼 수 없고 백화정이라는 소담스런 정자 하나가 있다. 1552년에 건립된 하서의 외헌(外軒)을 복원한 것이다.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이름은 중국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해주에 귀양 가 있을 때 성 밖의 서호(西湖)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 백화주(江錦水榭 百花州)’라는 시(詩)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집 앞 달걀 모양의 난산(卵山)이 조망되고 주변의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백화정은 백화(百花)라는 이름처럼 주변이 온갖 들꽃으로 가득했던 모양이다. 이곳은 하서의 휴식공간이자 창작공간이었고, 또 많은 지인들과 차를 마시고 토론했던 교류공간이었다. 하서는 1549년에 순창에서 대학강의발(大學講義跋)과 천명도(天命圖)를 짓고 1550년에 본가로 돌아온 후 10여 년 동안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1493~1583),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1513~1577),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1527~1572) 등과의 교유(交遊)는 물론이고 그의 심오한 도학(道學)을 집약한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등의 저술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시작(詩作)에도 각별한 소질을 보였던 그는 1천600여 수의 시도 남겼다. 백화정에서 탁 트인 자연을 조망하고 뜰에 핀 온갖 꽃(百花)을 감상하며 자연의 이치를 배웠을 것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사람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본질을 터득했던 것 같다. 그것은 ‘하서집(河西集)’에 실려 있는 ‘자연가(自然歌)’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산 절로 물 절로 산과 물 사이 나도 절로(山自然 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아마도 절로 난 몸이라 늙기도 절로절로(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말하자면 푸른 산도 자연이고, 푸른 물도 자연이며 그 산과 물 사이에 살고 있는 자신도 자연이라고 여기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리대로 생각하고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추구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백화정에 피어 있는 소박한 들꽃처럼 몇 마디 되지 않은 자연가(自然歌)는 학문과 삶을 대하는 그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국가로부터 공인된 호남 최대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사적 제242호)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았다.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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