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보성 대계서원-은봉 안방준

14번 벼슬 불러도 출사 안하고 80년을 초야에
권력에 초연하고 의를 중시했던 호남의 선비
의병사 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저술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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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읍 우산리 소재 대계서원 영역 편집에디터
보성읍 우산리 소재 대계서원 영역 편집에디터

보성여중에서 좌로 꺾어 택촌마을 밑 굴다리 지나면 우산리(牛山里)다. 길이 좁아 경운기나 다닐 만하고, 굴다리가 낮아 버스는 못 들어갈 형편이다. 들에는 갓 모내기한 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반듯하지가 않고 지렁이 기어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못줄을 잡고 하던 모내기만 못하다. 하긴 그것이 직선인들 어떠하고 곡선인들 어떠하리. 가을 돼서 누렇게 잘 익으면 그만이지. 허리 펴고 멀리 보이는 끝에 검게 빛나는 기와지붕들, 대계서원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유물관, 동재, 서재, 강당이 넓게 자리하고 내삼문 왼편에는 높지 않은 잠언비가 서 있다. 대계서원의 주인공 은봉 안방준(1573~1653)이 지은 ‘구잠(口箴)’이다. 잠(箴)은 바늘이고, 경계한다는 뜻이다. 구잠은 말 조심, 주잠(酒箴)은 술 조심이다. 공자가 안회에게 말한 네 가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했던 그 경계가 ‘사물잠(四勿箴)’이다.

口箴(구잠)

言而言(언이언) 말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하고

不言而不言(불언이불언) 말해서 안 될 때는 말하지 마라

言而不言不可(언이불언불가) 말해야 할 때 말을 안 해도 안 되고

不言而言亦不可(불언이언역불가) 말해서는 안 될 때 말을 해서도 안 된다

口乎口乎(구호구호) 입아 입아

如是而已(여시이이) 이렇게만 하여라.

장자에 나오는 ‘애태타(哀??)’. 위나라 사람으로 얼굴도 못생기고, 돈도 없고, 낙타처럼 곱사등이다. 사람들이 추인(醜人)을 예시할 때 꼭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만나본 남자들은 전부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여자들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애태타의 첩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애태타는 그의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아 남의 배를 채워준 적도 없다. 그렇다고 학식이 높고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며, 뛰어난 지도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안도 볼 것 없고, 외모도 볼 것 없고, 언변도 없고 뭐하나 제대로 내세울 만 한 것이 없는데도 사람들 모두 그와 친해지려 했다. 심지어 노나라 애공은 그의 매력에 빠져 재상 직을 제안했다. 애타타는 수락하는 듯 했으나 달가워하지 않았고, 곧 말없이 떠나버리고 만다. 절정의 순간, 나를 놓아버리는 무아(無我)의 큰 그릇. 공자는 그를 빈 배라고 했다. 흐르는 물을 따라 거스르지 않고 흘러가는 빈 배. 스스로를 비우니 마음이 평화롭고, 온화하며, 덕(德)이 있으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만인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흐르는 물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을 잡고 있는 서 있는 낚시의 찌처럼, 육십갑자 중용의 내공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말에 대하여, 벼슬에 대하여, 부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유유자적한 대자유인들, 은봉에게서 애태타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안방준은 보성 오야리(현재 우산리)에서 부 안중관, 모 진원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계부 사마공 중돈이 일찍 세상을 떠나 은봉이 양자로 갔다. 자는 사언, 호는 은봉(隱峯), 우산(牛山), 빙호(氷壺) 등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어려서 박광전, 박종정에게 배웠다. 19세에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성리학의 수업을 받았다. 그의 학맥은 여말 포은으로부터 시작하여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의리학맥’으로 연결된다. ‘은봉(隱峯)’은 존경하는 포은(圃隱) 정몽주의 ‘은(隱)’과 중봉(中峰) 조헌의 ‘봉(峰)’을 한자씩 따서 호를 지었다.

은봉이 활동했던 16세기 초에서 17세기 중기에는 대내외적으로 혼란이 거듭 된 시기였다. 붕당의 심화로 인해 당리당략만을 일삼는 지배층은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으며 그 와중에 4차례의 외침이 발발해 국토 전역이 황폐화 되었다. 당시 지배층은 사회 안정을 위해 유학 이념을 내세웠는데, 은봉은 의리실천을 통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이런 혼란의 시기에 직접 의병 활동에 나섰으며,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일생을 바친다. 2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 박광전을 따라 전라좌의병의 참모로 활동했다. 두 번의 호란(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는 호남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또 호남지역 충의열사들의 유적, 유물의 보존과 업적을 기리는데 정성을 다했다.

조정에 안방준의 이름이 알려져 관직을 제수 받은 것은 52세 되던 1624년.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는다. 이어 8월에 오윤겸의 천거로 오수도 찰방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불과 19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다시 보성 우산으로 돌아온다. 시사를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것이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14번의 관직 제수에서 13번을 보이콧한 것이다.

그의 학문은 위기지학, 실천지학으로 자식된 자가 ‘효(孝)’ 글자를 배우면 반드시 어버이에게 효도를 실천한 뒤에야 ‘효’ 문자를 배운 사람이라 부를 만하고, 신하된 자가 ‘충(忠)’ 글자를 알면 반드시 임금에게 충성을 실행한 뒤에야 비로소 ‘충’ 문자를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실로 충과 효를 실행함이 없다면 비록 ‘충효(忠孝)’ 두 글자를 수만 번 외우더라도, 당초에 ‘충효’ 두 글자를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안방준은 만년에 능주 한천면 매화정에 은봉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다 1654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2년이 되던 1656년에 능주 유생들은 은봉이 지냈던 곳에 도산사를 세워 제향하였고 1657년(효종8년) 보성에 은봉을 독향하는 대계서원을 건립하여 1703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은봉은 말과 글이 아니라 삶과 실천으로, 현실적 이해나 세속적 가치를 넘어 인간 본연의 의(義)와 덕(德)을 실천궁행하였다. 그리고 권력에 대해 초연했던 대목이 장자 애타타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그 초연이라는 것이 양쪽을 다 봐야 가능한 것이며, 여러 가지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본심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계절이 바뀌듯이 외부적 조건을 의연히 받아들이며 초조해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돌 같은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은봉은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했으며, 의병사 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호남의병록’ 등 다수의 편저를 남겼다.

은봉의 다양한 저술들

은봉의 절의사상에 대한 실천의지는 그의 저술에서 잘 나타난다. 15세에 쓴 녹두만호의 순절행적을 그린 <이대원전>을 시작으로 81세에 쓴 <매환문답>까지 18편 가운데 스승 성혼과 관계된 4편을 제외하면 모두 절의와 관련된 내용으로 임진왜란기 호남 의병을 주로 다루었다. 24세에 진주성 전투의 충절인물 사적을 정리한 <진주서사>를 지었는데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의병들로부터 듣고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그것도 난중에 저술한 것이다.

1615년에는 <호남의록>과 함께 <임정충절사적> <삼원기사>를 찬술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은봉은 충절인이나 충절사적의 정리에 모든 정열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호남의록>은 그 중 임진왜란 때에 호남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최경회. 정운. 백광언. 유팽로. 양산숙 등 16인의 유사와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의병들의 활동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임정충절사적>과 <호남의록> <삼원기사> <노량기사> 등은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의병장을 다룬 것이다. 이를 통해 안방준의 저술의 배경이 주로 임진왜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안방준의 저술 활동과 정표 운동은 어릴 적 부터 지녀왔던 충신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절의사상의 표출이었으며 나아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하고자 했던 은봉의 의지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중봉 조헌의 ‘청절위’를 정리한 <항의신편>, 1575년부터 1650년 까지 동인.서인 양측의 시비를 모아 편집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서술한 <혼정편록>을 썼고, 1589년 기축옥사에 관한 은봉의 평론으로서 송강 정철의 처지를 옹호한 <기축기사>는 은봉 안방준의 안목에서 재정리된 당 시대의 분위기와 평가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우산문답>을 지어 진유眞儒란 학문보다는 절의가 뛰어난 자라고 평가했다. 즉 절의가 진유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학문이 아무리 뛰어나도 진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안방준의 사상은 기축옥사를 거치면서 적극적인 실천만이 현실에 닥친 위기를 풀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학문과 절의 가운데 절의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손인 안은봉문강공존회 안장호(74세) 부원장은 “당시 난중에 이만한 저술을 남긴 것 하며, 특히 그런 꼼꼼한 기록들이 당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70대에 서원 일 보는 막내라고 한다.

내삼문(숭도문)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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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으로 들여다 본 사당(조문사)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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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계서원 강당_문중 부원장님과 필자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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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계서원 강당1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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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계서원 강당과 사당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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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계서원 들어가는 길, 모내기한 모들이 지렁이 기어가는 것 같이 줄지어 서 있다.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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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계서원 사당 조문사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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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조문사(祚文祠)_문강공 은봉 안선생 신위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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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 장절문_문중 안장호 부원장님과 함께 얘기중인 필자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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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 격치재(좌), 전사청(우)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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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대한 잠언_구잠_은봉 안방준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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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으로 본 내삼문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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