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의 도자 이야기> 전라도의 큰 고을 나주 분장청자, 바다를 따라 한양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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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마도 해역은 강한 물살과 암초, 짙은 안개 등으로 선박들의 난파 사고가 매우 빈번한 곳으로 피하고 싶지만 수도인 개경과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경유지였다. 동력을 갖추지 못한 당시의 돛단배는 바람에 의지해 항해하기 때문에 태풍 등으로 풍향이 바뀌거나 물살이 세면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마도 해역은 옛날부터 항해가 어렵다는 뜻으로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렸으며, 많은 배가 침몰되어 ‘수중 문화재의 보고(寶庫)’ 역할을 하면서 신안선에서 출발한 한국 수중 고고학의 새로운 전기와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마도 해역에서 발굴조사된 마도 4호선은 좌현 외판의 일부를 제외하고 외형이 잘 보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선체에서 목간 63점과 분청사기 155점, 도기 8점, 금속품 3점, 목제초본 72건 115점, 석재 12건 32점, 곡물 6점, 골각 1건 3점 등 321건 386점의 유물이 출수되어 조선시대의 다양한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마도 4호선의 남아 있는 크기는 길이 12m, 너비 5m, 깊이 2m 정도이며, 마도 북동쪽 수심 9~15m에서 확인되었다. 선체는 남동쪽(150°)을 향해있었으며, 우현 방향으로 50° 정도 기울어진 채 매몰되어 있었다. 선체의 구조는 밑판 3열, 좌현 외판 4단, 우현 외판 11단, 그리고 선수(船首)와 선미(船尾) 부분도 일부 남아 있는 평저선이다. 이전의 고려시대 선박은 선수 판재가 세로로 설치되었지만 마도 4호선은 가로로 설치되었으며, 좌우 외판재를 연결하는 가룡목(加龍木)은 2m 정도 간격으로 6곳에 설치되었다. 또한, 고려 선박은 비교적 얇은 원통목을 사용하였지만, 마도 4호선은 두껍고 강한 횡강력재를 사용해 선체의 견고함을 높이고 있어 한층 발전된 조선술을 알려주고 있다.

목간류는 모두 63점으로 43점이 목간이며, 죽찰은 20점으로 목간과 죽간은 형태에 약간의 차이가 다르다. 목간은 주로 발송처와 수취처를 적고 있으나 일부 목간은 세곡의 종류와 수량만 간단하게 적고 있어 길이 15㎝ 내외로 고려시대에 비해 크기가 매우 작다. 목간을 만드는 방법도 고려 목간은 가공에 정성을 들이고 있는데, 마도 4호선의 목간은 벌채한 다음 한쪽 면만 가공하여 글씨를 쓰고 있다. 그리고 수령도 오래되지 않고 가늘며 강도도 떨어진다.

목간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의 고려시대 목간에 비해 단순하면서 간결하지만 조운선임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는 묵서의 내용이다. 고려시대 목간은 관청과 기관 등 보내는 곳이 다양하여 이를 구분하기 위해 발신자와 수신자, 화물의 종류와 수량 등을 정확하게 표기할 필요성이 있어 내용이 많다. 그러나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개인이 아닌 지방 관청에서 중앙 관청으로 보내는 공물에 대한 기록이 단순 명료하였던 것이다.

목간의 내용 가운데 지명은 ‘나주’가 유일하며 55점이 확인되었다. 수취처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은 54점으로 광흥창을 뜻하는 ‘羅州廣興倉’이 적혀있다. 또한, 화물의 종류를 알려주는 목간은 2점으로 ‘白米十五斗(백미십오두)’와 ‘麥三斗(맥삼두)’가 적혀 있다. 곡물의 종류와 수량이 적혀 있어 목간이 화물의 물표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도 4호선은 나주목에 설치된 영산창에서 거둬들인 세곡과 공납품을 싣고 수도인 한양에 있던 광흥창으로 공물을 운반하였던 조운선임을 알 수 있다. 광흥창은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하던 국가 기관으로 고려 충렬왕 때 처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다. 광흥창은 현재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광흥창역 부근에 있었는데, 각종 문헌에 전국에서 출항한 조운선이 도착하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마도 4호선 목간은 이들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려시대 배인 마도 1호와 2호, 3호선은 대부분 당시의 권력자나 개인에게 보낸 화물을 운송하던 선박으로 조운선 여부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마도 4호선은 조선시대 선박이지만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던 국가 기관인 광흥창으로 공물을 운반하고 있어 현재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국내 유일의 조운선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마도 4호선에서 출수된 분장청자는 가장 대표적인 일상 반상용기인 발과 접시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155점이 확인되었다. 이들 분장청자는 10점 혹은 20점 단위로 포갠 다음 60점의 청자를 성글게 엮어 만든 망태기에 담아 그릇의 종류별로 적재하였다. 이는 그릇 종류별로 포갠 다음 4개의 나무 막대를 길게 덧대 새끼줄로 묶었던 고려시대 포장 방법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들 분장청자의 형태는 대체로 비슷하나 크기에 차이가 있으며, 청자음각파상문발 1점과 청자발 2점 이외에는 인화문을 꽉 차게 시문하고 있다. 태토와 유약의 색상은 갈색, 회색, 녹청색 등 세 종류인데, 기종과 시문 기법 등에 따라 색상 차이가 뚜렷하다. 유약은 굽 안바닥을 포함하여 그릇 전체에 시유한 것과 굽 부분을 시유하지 않은 것으로 구별된다. 굽부분을 시유하지 않은 것은 그릇을 포개 구울 때 다른 그릇과 서로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여 번조 후 쉽게 분리하기 위해서 이다. 번조 방법은 그릇을 두 개 이상 포갠 다음 굽고 있어 가장 위에 놓고 구운 그릇은 내저면에 받침 흔적이 없으며, 중간에 놓고 구운 그릇은 내저면과 굽바닥에 거친 태토비짐을 받치고 있다. 가장 아래에 놓고 구운 그릇은 내저면은 태토비짐을 받치고 있으나 굽바닥은 도지미 위에 모래를 받쳐 번조하여 모래 흔적이 남아 있다. 굽 형태는 그릇의 종류에 관계없이 대부분 굽 측면이 대마디 형태인 죽절형(竹節形)이다. 한편, 문양과 시문기법, 시유상태, 특히 굽의 형태와 높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는 일부 그릇은 제작지나 공방(장인)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

마도 4호선 출수 분장청자의 생산 시기는 필각(筆刻)으로 ‘內贍(내섬)’를 새긴 3점의 분장청자가 많은 단서를 제공하였다. 내섬은 궁궐의 물품을 관리하던 관청인 내섬시(內贍寺)를 이르는데, 태종 3년(1403) 관제를 개혁할 때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태종 5년(1405) 육조의 직무와 그 소속을 정할 때 호조에 소속되었으며, 정조 24년(1800) 국가의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의영고(義盈庫)에 병합되면서 폐지되었다. 내섬시의 역할은 왕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전담하는 전공아문(專供衙門)으로 그 대상은 왕비였다. 이러한 업무의 특성으로 태종∼세종 년간에 내섬시와 내자시(內資寺)는 호조에 속한 관사였음에도 이조에 속한 왕실 관청인 인수부(仁壽府)와 함께 왕실의 창고로 운용되었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공납제를 시행하여 한양의 여러 관청에서 사용할 자기를 각 군현에서 공물(貢物)로 상납받았다. 이들 자기는 전국에 있는 자기소(磁器所)에서 제작하였으며, 해당 지방의 수령이 장인으로부터 징수하여 중앙 정부에 납부하였다. 이러한 공납 자기는 여러 의례를 시행하면서 행사를 주관하는 전각(殿閣)과 관사별로 장흥고(長興庫)에서 빌려 사용한 다음 반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반납되지 않고 분실되는 사례가 많아 태종 17년(1417)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공납 자기에 관청의 이름을 새기도록 하였다. 따라서 ‘內贍’이 표기된 분장청자는 1417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공납용 자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릇의 형태와 문양, 제작 기법, 번법 등을 검토하였을 때 이들 마도 4호선 분장청자들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력이 증가하여 문화가 꽃피웠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15세기 초반에 만든 매우 우수한 제품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종 13년(1413) 공납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전라도 관찰사에게 매년 자기를 바치게 한 태종 13년 7월의 기록을 고려하였을 때 ‘內贍’이 쓰인 분장청자를 비롯한 마도 4호선 분장청자는 구체적으로 1413년부터 1418년 사이에 생산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마도 4호선은 1410~1420년(태종~세종)에 물품을 싣고 항해하던 중 마도 해역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분장청자의 생산지는 나주목 영산창에 조세를 납부하는 군현(郡縣) 가운데 ‘세종실록’ 지리지에 자기소가 기록된 지역이다. 또한, 1410∼1420년 사이에 ‘內贍’의 글씨가 확인되는 자기소가 있는 곳이 유력한데, 여기에 해당되는 곳은 나주와 영암, 영광, 광주, 곡성, 순천, 고창 등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들 지역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마도 4호선에서 출수된 분장청자의 정확한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마도 4호선은 목간의 내용으로 보아 나주목(羅州牧)에서 징수한 세곡을 비롯하여 대나무와 분장청자를 비롯한 여러 공물을 싣고 한성부(漢城府)의 한강변에 있는 광흥창(廣興倉)으로 항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종∼세종 연간에 나주목에 소속되었던 27개 주현(州縣)의 조세를 받아들여 보관하고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역할은 나주목에 설치된 영산창(榮山倉)에서 담당하였다. 분장청자에서 확인된 내섬시는 광흥창과 함께 호조에 속한 관청이다. 따라서 ‘羅州廣興倉’과 ‘內贍’의 명문은 마도 4호선이 공물을 운반하던 조운선임을 뚜렷하게 알려주고 있다.

목간과 분장청자 이외에도 세곡으로 선적한 벼와 보리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