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곁으로 간 ‘5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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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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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중항쟁을 상징하는 인물은 윤상원 열사(1950~1980)다. 그는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5·18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에는 늘 그가 등장한다. ‘윤상원 평전’이 출간됐고, 창작 판소리 ‘윤상원가’도 만들어졌다.

왜 윤상원인가. 도청을 사수한 항쟁 지도부를 대표해 윤상원은 목숨을 제단에 바쳤다. 그는 신군부의 폭력에 죽음으로 항거해 항쟁을 완성시킴으로써 살아남은 자들을 늘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1980년 5월 26일 전남도청 2층 외신기자 회견장에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남긴 말이다. 최후의 항전에 앞서 윤상원은 도청에 남은 시민들을 향해 “학생과 여성 여러분은 살아 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한 뒤 이들을 내보냈다. 그는 신군부가 언론과 통신을 일절 차단했던 5·18 기간에 ‘투사회보’ 발행인을 맡아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눈과 귀가 되었다.

광산 출신으로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상원은 1978년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에서 근무한다. ‘아버님께 마지막 효도 한 번 하겠다’며 취업을 한 그는 6개월 만에 사직을 하고 광주로 내려온다. 그 후 광천공단의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밤에는 후배 박기순 등과 함께 미취학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된 들불야학의 교사로 일했다. 박기순이 22세의 나이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자 윤상원은 누구보다 슬퍼했다. 윤상원도 2년 후 그녀를 따라 갔다. 5.18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은 망월동 묘지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린다. 이들의 영혼결혼식 넋풀이를 위해 만든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아들이 죽으면 아버지는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윤상원의 부친 윤석동은 아들이 숨진 후 슬픔을 딛고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을 맡아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힘을 쏟았다. 그 아버지가 지난 16일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장남을 가슴에 묻고 39년을 비통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원한다.

박상수 주필 sspark@jnilbo.com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