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영의 그림 큐레이션> 삶의 깊이, 깊고도 강인하게.

사라짐과 생성의 순간, 삶을 되묻는 론 뮤엑 (Ron Mueck 1958~. 호주)
연약한 비눗방울에 담긴 의미,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everett Mmillais 1829-1896. 영국)
경이롭고도 강인한 생명력 (김제민 1972~.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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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순환, 같은 길을 가는 우리.

인류가 시작된 그때부터, 인간은 똑같은 순환을 한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다시 사라지는 순환. 지구의 외형도 인간의 삶의 행태들도 끝없이 변화했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 삶의 순환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상황, 더 강인한 생명력을 무장하며 우리는 삶을 영속한다. 무심하게 일상에서 뒤로 물러난 생각들이지만, 예술가들에게 이는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작품들에 담아낸 삶의 깊이, 그리고 작품들은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삶을 어떻게 영속할 것이냐고.

론 뮤엑 1996사진 출처 http://withreferencetodeath.philippocock.net/blog/mueck-ron-dead-dad-1996/ 편집에디터
론 뮤엑 1996사진 출처 http://withreferencetodeath.philippocock.net/blog/mueck-ron-dead-dad-1996/ 편집에디터
론 뮤엑 2006 사진출처http://www.melbourneplaces.com/melbourne/ron-mueck%E2%80%99s-sculptures-at-the-ngv-a-confronting-and-haunting-experience/ 편집에디터
론 뮤엑 2006 사진출처http://www.melbourneplaces.com/melbourne/ron-mueck%E2%80%99s-sculptures-at-the-ngv-a-confronting-and-haunting-experience/ 편집에디터

진짜 같아 더 당황스러운 진실.

분명 진짜 사람 같은데 관람자들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작품의 제목은 1996. 바닥 한가운데 누워있는 사람은 작가인 론 뮤엑의 아버지이다. 작은 남자의 손과 발은 힘없이 축 쳐지고 두 눈은 지그시 감겨있다. 부풀어 오른 가슴은 다른 신체부위에서 숨이 더 빠져나감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뮤엑은 실제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 느꼈던 감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생명이 온몸에서 빠져나가고 마치 2~3살의 신체와 같은 크기로 아버지가 작아지는 것 같았던 감정을 표현했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혼, 숨이 희미해지며 존재도 희미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2006년에 제작된 작품 은 거대한 아기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쭈글쭈글한 얼굴이며 탯줄이 그대로 달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 엄마의 자궁을 막 빠져나온 아이지만 크기는 5M에 육박한다. 얼굴엔 세상에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흔적이 그대로이다. 생의 순간은 이렇게 거대한 시작인 것이다. 갓 숨을 불어넣은 갓난아기가 찬연히 피어낼 생의 축복된 시작을 이렇게 거대한 크기로 만들어냈다.

론 뮤엑은 장난감 사업을 하는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그 영향 덕분에 TV나 영화의 특수 효과, 캐릭터 제작을 하다가 조각가의 길로 들어섰다. 뮤엑은 인물들을 실물 크기로 만들지 않는다. 거대해지거나 작아지는 크기의 변형은 보는 이의 감정을 압도적으로 전환시킨다. 분명 진짜 같은데 진짜 같지 않은 생경함은 작품에 더욱 빨려들어가게 한다. “비록 표상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내가 포착하고 싶은 것은 삶의 깊이다.”라는 뮤엑의 말처럼 삶의 깊이는 너무도 단순하게 물음을 던진다.

존 에버렛 밀레이_비눗방울_캔버스에 유채_1886 편집에디터
존 에버렛 밀레이_비눗방울_캔버스에 유채_1886 편집에디터

연약한 비눗방울 같은 순간.

앳된 귀여운 아이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니 허공에 떠 있는 비눗방울이 보인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표정, 곧 있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비눗방울에 안절부절이다. 고사리같은 작은 손에도, 포개진 다리에도 긴장감이 베였다. 아이의 양 옆 희미하게 그려진 두 개의 화분이 있다. 왼쪽 하단의 화분은 빈 화분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오른쪽 희미하게 그려진 화분은 아직 잎사귀가 푸릇푸릇하다. 지속되는 생명과 사라진 생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비눗방울, 영롱하고 찬란하게 빛나지만 곧 터져버릴 것 같은 허무한 인생을 말함이 아닐까. 주인공인 아이는 당시 5살이었던 밀레이의 손자이다. 이 작품은 또 다른 이유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심오한 의미를 내재한 그림이지만, 당시 비누 광고에 사용되면서 예술성은 상술에 밀려나가고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이야 제쳐두고 그림 안의 메시지는 마음을 찡하게 한다. 하찮은 비눗방울에 담아낸 삶의 의미, 텅 빈 화분에서 보이는 허무함, 삶의 순환은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을 테지만, 찬란한 찰나의 순간이 그 모든 것을 위안해주리라. 그림은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얽히고설킨_종이에 잉크 과슈_67x53cm_2019 편집에디터
얽히고설킨_종이에 잉크 과슈_67x53cm_2019 편집에디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하게

보드라운 흙이 아닌 도심의 딱딱한 바닥을 뚫고 안간힘으로 몸을 내민 이름 모를 풀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렇게 모두들 안간힘으로 제 몫을 다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김제민 작가는 이름 모를 풀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움을 그려간다.

근작인 ‘얽히고설킨’ 그림은 하얀 바닥 위 몸을 내민 나무가 주인공이다. 남는 철조망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며 끝없이 하늘로 뻗어 올라간다. ‘위험’이란 경고 문구도 빠짝 말라버린 허연 바닥도 개의치 않고 제 순을 끝없이 내밀고 있다. 철조망이고 가지이고 얽히고설킨 모양새지만 나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제 임무를 다하며 싱그러운 색을 뽐낸다. 김제민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관계 속에서 그들이 얽히고설켜있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이를 우리 삶의 여러 관계에 대한 은유로 해석해 그려낸다. 풀들은 그냥 풀이 아니고 나무도 그냥 나무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에는 인간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사이사이 얽히고설킨 나뭇가지처럼 삶도 얽히고설킴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 이름 모를 풀들처럼 강인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삶의 순환 사이, 그 기나긴 틈에서만은 강인하게 말이다.

삶의 깊이, 깊고도 강인하게.

뮤엑의 생경한 조각작품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삶의 순간, 밀레이가 느꼈을 삶의 회한, 김제민 작가가 그려낸 이름모를 풀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생명력. 예술가들은 특별한 것들을 본다. 삶의 표피 뒤에 감춰진 그 무언가. 크기가 일탈하고, 마음이 헛헛해지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씁쓸한 그 모든 것들을 슬며시 들이민다. 사라짐과 생성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예술은 삶을 말랑말랑하게 해준다. 알 수 없는 마음이 한껏 차오르기도 하고, 헛헛함에 여간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무미건조한 일상에 이런 작은 소용돌이같은 감정을 잠시마나 느껴보며 ‘삶의 깊이’를 다시금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