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광주 벽진서원-회재 박광옥

임란 때 사재 털어 의병 모집해 참전
조선 선비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
개산방죽에 애민정신 담은 목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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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동에 위치한 전평제_회재 박광옥이 44세에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매월동에 위치한 전평제_회재 박광옥이 44세에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벽진서원_회재 선생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필자 편집에디터
벽진서원_회재 선생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필자 편집에디터

회재로(懷齋路). 나주에서 광주 가는 길. 남평 사거리에서 출발하여 40리 길이니 꽤 멀다. 길은 거울에 비친 기역자처럼 북향하다 동쪽으로 꺾어진다. 사거리에서 올라가면 고싸움 놀이공원을 지나 대촌교차로에 이른다. 거기서 교차하는 사거리가 포충사(褒忠祠) 가는 길, 포충로다. 충을 기리는 곳, 누구의 충인가. 충렬공 고경명의 충이다. 때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고 강토를 휩쓸어 버리던 풍전등화의 시절.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 5만명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겨우 수천의 왜군에게 어이없게 패하고 말았다. 고경명은 분연히 일어선다. 격문을 돌려 6천명의 의병을 모아 진용을 편성하고 참전하여 거듭되는 승전보를 전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작은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만다. 고경명이 분연히 일어설 때, 함께 일어선 사람이 또 있으니 이 길의 주인공 회재다.

회재 박광옥(1526~1593). 조선 중기 문인으로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다. 탯자리인 회산마을 자택 동북쪽에 서실 두 칸을 지어 편액을 회재라 했으므로 사람들이 ‘회재선생’이라 불렀다. 해남의 윤선도, 보성의 안방준 집안과 함께 호남의 3대 부자였고, 광주 최고의 갑부였다. 지금의 광주 월드컵경기장, 풍암지구의 센트레빌 아파트 등이 음성박씨 문중 땅이었다. 박광옥은 그 많은 재산을 호국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으니,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한 세상을 살았다. 그는 관직을 떠나 낙향해 있는 와중에 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고경명 등과 더불어 왜적 토벌에 나설 것을 결의하고 의병 모집 활동을 주도한다. 회재는 고령과 노환으로 직접 출전할 수 없게 되자, 사재를 털어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모아 조달하는 일을 맡는다. 1,2차 호남근왕병 출병 때도, 김천일과 고경명의 거병 때도 병무지원을 도맡아 처리했다. 권율의 ‘이치전투’와 ‘행주산성’의 전투 당시 연고가 없는 전라도 의병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회재가 이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지원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거부였지만 거친 잡곡을 먹었고, 밥상 위에는 둘 이상의 반찬을 놓지 않도록 했으며, 고기 찬이 올라오면 먹지 않고 ‘임금은 어디 계시며 이때가 어느 때냐?’며 오래 통곡했다고 한다. 회재의 이름을 따서 길이 생기고, 벽진서원이 건립되는 등 오늘날 박광옥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다.

회재는 대동고등학교가 있는 개금산 아래 매월동 회산마을에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서 3년 상을 치렀다. 집안의 어른이 된 형 광정은 동생을 엄하게 키웠고 광옥에게 세상의 이치를 일깨워 주었다. 조광조의 제자였던 정황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 21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바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문과 준비에 전념하지 않았는데, 그 해 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재산관리와 집안을 일으키는 일이 광옥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하고 제례도 흐트러짐이 없어 ‘마음이 옥(玉)과 같고, 용모도 옥(玉)과 같고, 이름 또한 옥(玉)과 같아 삼옥(三玉)’이라 불렸다고 한다.

1556년 회산마을 개산 서쪽에 ‘개산송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상주하는 제자가 수 십 명에 달했다. 박광옥은 고향에 머물면서 서당을 세우고 향교 중수에 참여하는 등 지방 교육 발전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광주향교가 중수된 뒤 <향교비음기>를 청하자 전면 비문은 고봉이 짓고, 회재는 비석 뒷면에 음기를 지었다. 그러는 와중에 박광옥은 사비를 들여 제방을 쌓았다. 가뭄으로 고통 받는 매월·벽진마을 백성들을 위해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둑을 쌓고 ‘개산방죽’이라 불렀다. 회재는 재산 불리는 일에 골몰하기 보다는 그것으로 구휼하는 일에 더 가치를 두었다. 그 제방이 당시는 가뭄을 해결하는 방죽으로,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방죽 위에 수월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고봉, 사암 박순, 제봉 고경명 등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우정을 쌓았다. 이이, 노사신 등과도 교류하였으며, 김언거의 풍영정까지 나아가 시를 논하기도 했다.

그는 45세 늦은 나이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관 교관으로 첫 벼슬을 시작했다. 49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 운봉현감(1577년)이 되어 태조 이성계의 그 유명한 ‘황산대첩비’를 세운다. 이 비는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가 남원 운봉읍 화수리 황산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섬멸한 대첩을 기린 비다. 400여년을 지켜오던 이 비는 일제에 의해 1945년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1957년, 파손된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 다시 비각을 세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파비각(破碑閣)’이다. 그가 외직인 수령으로 나가면서 가장 신경 쓴 일은 향교를 살피고 고을 자제들에게 학문을 강독하는 일이었다. 영광군수 시절에 성균관을 모델로 세운 향교는 호남 최대 규모였다. 그의 청렴과 목민관의 자세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운봉의 백성들은 그를 잊지 못해 치적을 돌에 새겼다. 영광과 밀양에도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선조는 의병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승정원 판교에 이어 나주목사에 제수한다. 선조는 ‘호남의 충의신’이라며 극찬했다. 병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 박광옥은 1593년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사후 벽진서원에 배향되었고 김덕령이 추가 배향되면서 의열사로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고종 때 훼철, 1927년 서구 금당산 아래 ‘운리영당’을 신축해 향사해오다 도시개발로 편입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2018년 다시 ‘벽진서원’으로 복설하여 향사해 오고 있다.

음성박씨 정승공파 25대손 박상배 종친회장(60세)은 “2018년 7월, 벽진서원이 새로 복설되었습니다. 회재 할아버지는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였고, 절의정신과 선비정신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후손으로서 정말 자랑스럽죠, 저희 종친회에서는 회재 선조의 뜻을 살려 절의정신과 선비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으로써 정체성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학술대회를 통한 회재 서생의 조명과, 7월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계수련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라고 했다. 회재집에서 읽은 회재를 만난 듯 대화 속에 겸손과 자긍심이 느껴진다.

회재로는 대촌교차로 지나 지석제라는 작은 저수지 앞에서 눌재로와 만난다. 이 길은 눌재(訥齋) 박상(朴祥)을 기리는 길이다. 눌재는 회재보다 50여년 먼저 태어나 회재가 5살 때 세상을 떠났지만, 둘 다 조선 중기의 호남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였다. 눌재는 정조가 그의 시에 대해 “청아·고고하고 담박하여 저절로 한없는 맛이 있다(淸高淡泊, 自有無限趣味)”고 좋아했던 사람이고, 회재는 그 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사람 아닌가. 동시대를 살았던 둘이 500여년이 지나 길에서 동행하고 있다. 두 길은 그들의 고향, 광주 서구에서 한참을 나란히 걷다가 봉학제 저수지 지나, 눌재는 서창으로 가고 회재는 풍암을 향해 휘어지면서 다시 두 길로 나뉜다. 회재로는 더 북서진하여 전평제에 이른다. 회재가 백성의 가뭄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직접 쌓은 제방, ‘개산방죽’이 바로 지금 지나는 전평제다. 회재로는 풍암 호수공원에서 회재가 배향되어 있는 벽진서원을 우로 하고, 백운 교차로 즈음에 독립로와 만나면서 끝난다. 자신에게 엄격했고 남에게는 늘 베풀었던 선비 회재 박광옥. 남평에서 시작된 6차선의 그 길이 ‘회재로’인 것은 명예와 지위보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과 백성을 향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사람들은 ‘회재로’라는 이름으로 회재 박광옥의 삶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box 기사

회재의 둘째딸은 ‘주역각시’

회재에게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에 통달하고 동물 소리까지 알아듣는 총명한 재주를 지닌 영특한 딸이 있었다. 과년한 나이가 되어 전북 남원의 명문가로 이조 판서를 지낸 노정(1518~1578)의 아들과 혼례를 올렸다. 그런데 결혼 첫날 밤에 신랑과 함께 자리에 누웠다가 방구들에 숨어있는 쥐들의 대화를 듣고 웃는 것이 화근이 되어 시댁에서 소박을 맞고 친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결혼 첫날밤 이후 친가에서 보내게 되었고 그 억울한 이야기도 해명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시아버지 노정공이 불쑥 사돈댁을 찾아왔다. 정말로 며느리가 쥐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일부터 도포자락 안에 제비새끼를 한 마리 넣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며느리의 인사를 받고 회재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데 대문 옆 큰 나무에 어미 제비 한 마리가 지지배배 시끄럽게 운다.

“아니, 대문 옆 나무에 제비가 이 댁에 손님이 왔는데도 왜 저렇게 슬피 우는지 모르겠다.”

“내 새끼가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기로도 가죽으로도 털로도 쓰지 못하니 돌려달라고 하네요, 아버님 도포 속에 있는 제비 새끼를 놓아주십시오!’한다.

과연 어미제비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슬픈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것 같다. 옥계 노정은 도포 속에 넣고 온 제비새끼를 꺼내어 마룻바닥에 놓아주니 어미제비가 재빨리 입에 물고 날아갔다. 그래서 회재의 둘째 딸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풀리고 신원되었지만 노씨 문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때가 늦어 일생을 친정에서 지내며 아버지를 도와 막대한 가산을 이루게 하고 그 재산으로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개금산에 노적가리를 쌓아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등 창의倡義를 도와 큰 공훈을 세웠다.

사서는 물론 주역까지 통달하여 만물을 꿰뚫어 보고 심지어 동물의 말소리 까지 알아듣는 재능을 추앙하여 ‘주역각시’라는 칭호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벽진서원 강당_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 위치. 동부센트레빌 아파트와 SK뷰 아파트 숲 사이에 있다. 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강당_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 위치. 동부센트레빌 아파트와 SK뷰 아파트 숲 사이에 있다. 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강당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강당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내삼문 경모문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내삼문 경모문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사당 의열사 내 회재 박광옥 선생 영정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사당 의열사 내 회재 박광옥 선생 영정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사당 의열사_문중 총무님과 이야기 중인 필자 편집에디터
벽진서원 사당 의열사_문중 총무님과 이야기 중인 필자 편집에디터
음성박씨 문중 종원들 편집에디터
음성박씨 문중 종원들 편집에디터
전평제 나무 다리 건너 수월당이 복원되어 있다. 편집에디터
전평제 나무 다리 건너 수월당이 복원되어 있다. 편집에디터
전평제_전경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전평제_전경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전평제_회재 선생이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던 개산방죽, 평일에도 많은 시민들이 힐링처러 다녀간다. 여름엔 호수 전체가 연꽃으로 가득 찬다고 한다.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전평제_회재 선생이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던 개산방죽, 평일에도 많은 시민들이 힐링처러 다녀간다. 여름엔 호수 전체가 연꽃으로 가득 찬다고 한다.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전평호수 지난해 연들이 아직도 함께 한다.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전평호수 지난해 연들이 아직도 함께 한다.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음성박회재선생광옥지묘 편집에디터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음성박회재선생광옥지묘 편집에디터
회재 박광옥 영정1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회재 박광옥 영정1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