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새 운영시스템 도입 명성 알려

나의 삶, 나의 도전<4>-김재규 교육그룹 회장
평생합격회원제·기숙학원 도입  우려 불식되자 타 학원들도 채택  10만평 안동캠퍼스 국내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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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아픔을 주는 사람들만이 있지는 않았다. 당시 다른 학원 원장이 경찰학, 수사 강의를 조건으로 독립적 사무실과 강의실을 마련해주었다. 이후 그는 몇차례 학원건물을 이동하면서 김재규경찰학원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러던 2009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현재의 건물로 이전, 서울 김재규경찰학원의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됐다.

 학원운영이 안정되고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그는 또 다른 시도를 하게 된다. 학생들이 2개월 단위로 20~30만원의 학원비를 내며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심지어 부모님까지 속여야 했다. 이때 그가 국내에 처음 도입한 제도가 ‘평생합격회원제’였다. 59만원만 내면 합격할 때까지 학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학원들에서 “그돈 받아서 어떻게 학원을 운영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면 학원이 미어터질 텐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려에 불과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학생수는 항상 그대로 유지됐고 조절이 됐다. 그러자 손가락질하던 학원들이 이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새로운 시도가 또 다시 학원가를 휩쓴 것이다.

 승승장구를 이어가던 중 그는 또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 공부하는 학생들수에 비해 정작 합격자 수가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공부하는 학생 100명 가운데 1~2명만이 합격의 영광을 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학습진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한숨만 쉬는 학생들,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는 학생들을 목격하곤 했다. ‘시골 논밭 팔아 공무원 해보겠다고 서울 유학까지 왔을 텐데….’ 그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이때 그가 또 다시 도입한 것이 24시간 관리하는 성인기숙학원이었다. 역시 주위의 반대가 심했지만 학생과 부모님들을 상대로 상담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했던 그는 우선 40명을 대상으로 실험적인 운영을 해봤다. 6명밖에 남지 않았다. 일단 실패였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상담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다 세심한 점검에 들어갔다. 그런 뒤 결단을 내려, 평생합격 학생을 줄이고 기숙학원을 확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재규 학원 학생수가 줄어 망했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강도가 심했다. 그러나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꾸준히 기숙학원을 진행하자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숙학원 100명 중 한꺼번에 70~80명의 합격자가 나오면서 대기자가 100~200명씩으로 늘어났다.

 성공이었다. 역시 또 학원가에 기숙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유혹이 많은 곳이었다. ‘한적한 산속에 기숙학원을 만들면 어떨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10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러던 중 폐교된 경북 안동 건동대측에서 연락이 왔다. 3개월만에 현장을 찾은 그는 한 시간만에 장소를 결정해버렸다. 10만평에 걸쳐 기숙사, 강의동, 천연잔디가 갖춰져 있고 위락시설은 전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이번에는 ‘넋나간 놈’이라고 했다. 핸드폰 뺏고 인터넷 차단시키고…. 요즘 젊은이들이 누가 그런데서 공부를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밀어붙였다. 2~3년이 지나자 학생수가 100명, 200명, 500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공중파방송이 안동기숙학원을 메인뉴스로 다뤘고, 각종 기획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외국방송까지 특집방송을 쏟아냈다.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강조해온 김재규 회장이 강의가 끝난 뒤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울=강덕균 선임기자 dkkang@jnilbo.com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강조해온 김재규 회장이 강의가 끝난 뒤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울=강덕균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서울=강덕균 선임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