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안개 속을 걷다

유순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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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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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한나절 그치고 산위에 옅은 잿빛구름이 머무는 오후. 해는 얼굴을 내밀었다 감췄다 숨바꼭질 한다. 비가 완전히 그쳤는지 아닌지 가늠하기 어려운 날씨다. 하지만 오늘은 봉화산을 오르는 마지막 코스를 꼭 가봐야 한다. 내일 서울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있어서, 힘 덜 들이고 좋은 경치를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등산코스를 골라 안내하고 싶어서다. 산 입구인 배성금에 도착하니, 성난 파도는 단단한 갯바위를 깨 부시겠다는 듯 힘껏 달려와 부딪치고는 다시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올려다보니 산허리에 안개가 움직인 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오르리라.

가끔씩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가파르게 바다를 휘돌아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청석포해수욕장 앞바다가 커다란 삼각형 아쿠아마린처럼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리아스식 해안이 시야에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비경을 선사하는 곳이다. 그런데 안개에 가려 아쿠아마린(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영원한 젊음과 행복을 상징하는 3월의 탄생석)감상은커녕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마치 선과 악의 혼돈 속에 있는 듯 한동안 발길을 움직이지 못했다.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은 정적 속에 파도는 산도 무너뜨릴 기세로 으르렁댄다.

아득한 그 어느 날인가? 길은 많은데 여러 가지 길 중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던 젊은 날.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떨던 그날. 미지의 세계의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서 있었다. 그 때도 지금의 파도소리 만큼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문 열기 전의 그 순간이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시간은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아 결국 비밀의 문이 열리고, 찬란함을 꿈꾸던 뜨거운 희망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현실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다시 뒤를 돌아 숲을 향했다. 딱 걸어갈 수 있을 만큼만 보인다. 반경 2미터정도의 세상. 밤새 시험공부를 했는데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앞이 깜깜하다가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떠오르던 순간이 생각난다. 아주 짧은 거리만을 응시하며 걸어야하니 잡념이 파고들 틈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발로 길만을 더듬었다. 얼마 후 너덜겅으로 이어진 급경사에 이르렀다. 다행히 반대편에서 내려온 경험이 있어서 찬찬하게 발을 내디뎌 미끄러짐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길에만 집중한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천제봉 100미터’라는 푯말이 있는 삼거리에 다다랐다. 거기서부터는 안개가 없었다.

확 트인 천제봉에 오르니 사방에 크고 작은 섬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각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까이에는 하화도, 제도, 자봉도, 월호도가 아가자기하게 모여 있고, 멀리는 돌산도, 금오도, 고흥반도까지 이쪽을 향해 있는 듯하다. 마치 이곳이 세상의 중심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돌단에 누워 하늘을 본다. 흐르는 구름 같은 자유로움이 스며든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지금의 이 자유로움을 가두지 못하리. 일생에 몇 번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오래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다.

아쉬움을 남긴 채 천제봉 뒤편으로 이어진 길로 들어섰다. 내려가는 길은 넓은 흙길에다 경사가 완만해서 걷기에 좋다. 게다가 큰꽃으아리, 각시붓꽃, 홀아비꽃대 등 야생화가 한창이다. 그 모양은 좀 다를지라도 오르면서 보지 못했던 아쿠아마린도 볼 수 있다. 오르는 길은 좀 가파르지만 바다도 보고 새소리도 들으며 쉬엄쉬엄 올라가면 되고, 내려가는 길은 완만해서 오르면서 긴장했던 발걸음이 여유를 찾을 수 있어서 좋다. 예상했던 대로 이 길이 친구들에게 권할만한 최상의 길이다. 인생길도 오늘 이 길과 같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