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향한 뜨거운 열정… 그토록 염원했던 “대한독립만세”

임정 수립 100주년
광주·전남 출신 광복군
449면 광복군 중 지역출신 42명
징용갔다 탈출… 초모활동 활발
제5지대 나월환 대장 중심 활동
기념비·기념관 등 시설 부족
"애국지사 재조명 작업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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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능빈관(嘉陵賓館)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임시의정원을 비롯하여 중국 측 인사와 각국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 창설을 내외에 선포했다. 사진은 성립 전례식 직후 오찬장에서 축사하는 김구 주석(중앙 왼쪽 검은 옷). 독립기념관 제공 오선우 기자 sunwoo.oh@jnilbo.com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능빈관(嘉陵賓館)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임시의정원을 비롯하여 중국 측 인사와 각국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 창설을 내외에 선포했다. 사진은 성립 전례식 직후 오찬장에서 축사하는 김구 주석(중앙 왼쪽 검은 옷). 독립기념관 제공 오선우 기자 [email protected]

만주 독립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항일무장투쟁의 맥을 이은 조직인 한국광복군은 김구 주석 등의 주도 하에 1940년 9월 17일 중국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창설됐다.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조국 해방을 목표로 6년여간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며 일본 패망 이후 1946년 6월에 해체되기까지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는 등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총 4개 지대 편제였던 광복군은 그 규모가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1945년 4월 김구 주석에게 보고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군 장교 65명을 포함해 총 514명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규무 광주대교수와 윤선자 전남대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중 광주·전남 출신으로 알려진 이들은 모두 42명이다.

● ‘독립’을 가슴에 품기까지 험난했던 여정

42명의 광주·전남 출신 광복군을 살펴보면 강진 3, 고흥 1, 곡성 1, 광주 4, 구례 1, 나주 7, 담양 2, 무안 2, 보성 2, 순천 3, 신안 2, 영광 1, 영암 1, 완도 5, 장흥 2, 해남 2, 화순 2, 전남 1명이다. 광주와 나주, 완도 출신이 많다.

이들의 광복군 참여 동기는 크게 4가지다. 가장 많은 수인 20명의 경우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입대했다. 당시 대부분 20대 안팎의 청년들로, 사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에 독립운동 경력이 있던 이들도 많았다. 나동규·김승곤·조경환(이상 총사령부), 나월환(제5지대장) 등 많은 이들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선의용대, 독립군에 몸담았다. 이들은 광복군이 창설되자 만사를 제치고 달려와 합류해 핵심 간부로서 중요 임무와 활동을 도맡았다.

그 밖에 중국군에 몸담았다가 입대한 경우가 9명, 학병에서 탈출한 이들이 7명이다. 대부분 일본군대를 탈출해 중국군에 몸담았다가 입대하거나, 학병과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일제의 치밀한 감시를 피해 탈출했다.

당시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혹독한 처우와 총알받이 역할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은 멀쩡한 사람의 심신도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징용·학병으로 끌려갔던 이들이 탈출했다는 안도감과 극심한 전쟁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선뜻 고향으로 발걸음을 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직 조국 독립만을 생각하며 중국 충칭으로 향했던 그들의 뜨거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광주·전남 광복군 42명의 출신지 분포. 노성태 국제고 교사 출처 편집에디터
광주·전남 광복군 42명의 출신지 분포. 노성태 국제고 교사 출처

●구국을 위한 피땀 어린 노력과 수많은 희생

“당시 광복군은 일제 입장에서는 극악한 테러리스트였다. 비명횡사할 것을 걱정하며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바로 어제저녁에 함께 조국 독립을 의논하며 결의를 다지던 동지가 이튿날 행방불명되거나 주검으로 발견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1943년 12월 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본부 부관주임 겸 본부구대장을 지냈던 신안 출신 김배길(94) 애국지사가 아들 김규성(54)씨의 입을 빌려 전한 말이다. 당시 광복군에 대한 일제의 감시·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장교 30여명의 규모로 총사령부만 편성됐다. 이후 수백 명에 이르는 병력을 규합하며 군대의 면모를 갖추기까지는 병사를 모집하는 초모활동이 주로 이뤄졌다. 가장 활발히 초모활동이 전개됐던 나주 출신 나월환 대장이 이끄는 제5지대는 초기 편성된 4개 지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확보하며 ‘주력’이라 불렸다. 1942년 나 대장이 내부 배신으로 비명에 가기 전까지 100여명의 대원이 확보됐었고, 사고 이후 세력이 줄어들어 제2지대로 재편되면서도 80여명이 편성되는 등 광복군의 주요 전력으로 활동했다.

초모활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선전활동이었다. 녹록치 않은 상황 때문에 광복군의 창설과 존재, 그리고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려 많은 이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해야 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한 대 국제선전 역시 필요했다. 승주 출신 조경한은 광복군 제2지대 정훈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선전물인 ‘광복’ 간행을 주도했다. ‘광복’은 중국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소개하고 일본의 패망을 선전해 한중연합을 도모한다는 것을 주목적으로 했다.

나월환의 제5지대 초모활동은 광복군의 항일활동 기초가 되는 인적자원 확보와 부대편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조성한 주도 하에 간행된 선전매체 ‘광복’은 광복군을 대내외에 알려 동포들의 지원을 받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 독립에 앞장설 수 있게 만들었다.

나주 출신 나월환 대장이 이끌었던 한국광복군 제5지대 창설 기념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편집에디터
나주 출신 나월환 대장이 이끌었던 한국광복군 제5지대 창설 기념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대한독립만세’ 그리고 지금… 현실은?

1945년 8월15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독립을 피 흘리지 않고 얻어낸 기쁨에 광복군들은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광복군에 몸담았던 애국지사들과 그 후손들은 아직도 ‘진정한 독립’이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생을 목숨 바쳐 가며 나라에 헌신했던 이들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사회, 친일파가 국가유공자를 심사하고 선정하는 현실의 작태에 애국지사들이 염원했던 자주 대한민국은 요원하기만 하다.

김배길 애국지사의 아들 김규성씨는 “‘친일을 하면 삼대가 배부르고, 독립 운동을 하면 삼대가 빌어먹는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유공자 후손이면서도 비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렸고,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드러나지 않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며 “보여주기식, 생색내기식 정책 대신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는 유공자와 그 후손들을 발굴해 낼 실효성 있는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은 “한말 호남의병의 정신이 독립군과 광복군을 거쳐 지금의 국군 정신의 기초가 됐지만 알려지지 않은 호남 출신 광복군들은 여전히 매우 많다. 우리 지역 출신 광복군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시급하다”면서 “생존해 계시는 애국지사들 중 90% 이상이 광복군 출신들이다. 아직 살아계실 때 기억과 목소리를 채록하는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고, 한국광복군을 위한 기념사업도 따로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선우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