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커우 폭발 뒤 길길이 뛴 일제… 항저우로 피해 전열 정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 따라 ② 항저우 임정
윤봉길 의거 후 상하이 탈출 임정 요인들 힘겨운 도피생활
중국사람 주푸청이 장소 제공 김구 선생에 거액 현상금
가흥 은신처엔 비상 탈출로…요인들 살았던 장소 복원돼
함평 출신 국무위원 김철 선생 자신 숙소 내주며 임정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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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흥 김구 피난처 전경. 박수진 기자 sujin.park@jnilbo.com
중국 가흥 김구 피난처 전경. 박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목숨을 건 도피 생활이 이어졌다.

일제는 한인애국단장인 김구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60만 위안, 현재 한화 가치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현상금을 걸고 강력한 수색작업을 펼쳤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탈출해야만 했다. 김구 선생은 중국인 지사 주푸청 등의 도움을 받아 가흥으로 이동해 2년 간의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중국 가흥시 남문 매만가(梅灣街) 76호.

김구 선생이 일본 군경의 추격을 피해 숨어살았던 은신처다. 집 바로 뒤편에는 서남호라는 큰 호수를 끼고 있는 풍광 좋은 곳이다.

문 앞에는 ‘김구 피난처’라고 쓰여진 현판이 일행을 맞이했다.

1층에는 주 전시실이 있다. 우측에 별채 형태의 2층짜리 목조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김구 선생이 피신했던 장소다.

별채 1층은 접견실 겸 식당이었는데, 한 켠에는 비밀 문이 설치돼 있었다. 문을 열고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2층 다락방에 침실이 마련돼 있었다.

침실에는 침대와 옷장과 함께 마룻바닥에는 사람 한 명이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네모난 구멍이 나 있었다. 김구 선생이 호수에 드나들던 비밀통로다. 평소엔 나무판자로 덮어 뒀다가 일본 군경이 닥칠 때는 비상 사다리로 타고 내려갔다. 1층으로 가면 뒤편에 매어 놓은 조각배를 타고 호수로 피신할 수 있었다. 집에는 사방을 살필 수 있도록 동서남북으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김구 선생이 거주했던 집 구조만 보아도, 가흥 피신 시절은 얼마나 위태로웠던 순간이었을까를 짐작케 했다.

그 당시 느꼈을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져, 그저 집 방문과 계단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함께 한 전남대 김효선 학생(식품공학전공 1년)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매일 불안감에 떨며 피신생활을 했을 김구 선생의 모습이 그려져 가슴이 아팠다”면서 “그동안 독립투사들의 노고를 기억하지 않았던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제의 압박을 피해 독립운동이라는 대장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주푸청 등 중국인의 도움도 컸다는 사실에 고마움과 감동을 준다. 주푸청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수양아들 등 일가족을 총동원해 김구는 물론 이동녕, 김의한, 엄항섭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와 그 가족들까지 피신 생활을 하도록 했다.

김구 선생이 거주했던 매만가에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임정요인 피난처’가 위치해 있다. 남문 일휘교 17호. 가흥으로 온 임정요인들과 가족들이 거주했던 이곳도 고즈넉한 풍경을 담고 있었다. 1층은 전시실로 보존돼 있다.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피난생활에 큰 도움을 준 주푸청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도 전시돼 있다. 2층은 당시 임정 요인들이 살았던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당시 일제의 핍박이 더욱 거세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도 1932년 5월10일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항저우는 1932년 5월~1935년 11월까지 3년6개월간 임시정부의 활동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항저우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시다. 하지만 나라 잃은 임정 요인들에겐 그저 고단한 피난 생활의 기착점 중 하나였으리라.

1932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에 도착했다. 이때 국무위원인 김철 선생의 공은 매우 컸다. 김구 선생 등 임정 주요 인사들이 가흥에서 피난처를 마련하는 동안 김철 선생은 자신의 숙소인 청태 제2여사 (현 군영반점) 32호실에 ‘임시정부 판공처’를 설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속할 수 있도록 했다. 청태 제2여사의 외부는 임시정부가 머물던 당시와 달리 많이 훼손됐지만, 내부는 여전히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청태 제2여사에서 큰길로 나와 5분가량 걷다보면, ‘사흠방’이 나온다. 사흠방은 한국독립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따라 항저우로 이동해 본부로 사용했던 곳이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조소앙과 홍진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한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3년 말까지 상하에 본부를 두고 있었지만,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이동함에 따라 1934년 1월 본부를 이전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항저우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항저우 임시정부청사에는 김철, 송병조, 차리석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청태 제2여사를 비롯해 한국독립당 본부터인 ‘사흠방’, 복원된 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까지 모두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 중국 옛 거리의 정취가 물씬나는 사흠방 거리는 걷는 내내 호젓함도 누릴 수 있다. 이 거리를 거닐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피난시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임정을 꿋꿋이 지켜나간 애국지사들의 헌신을 되새겼다.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 지부장은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본의 탄압 거세져 임정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피생활을 해야만했다”면서 “특히 당시 항저우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철 선생의 공이 컸다. 김철 선생은 함평 출신의 호남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에 전 재산을 바쳐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분이다. 그 분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수진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