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뒤의 대한민국은 자주독립을 이루었소?”

상해 임시정부 요원이자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
천석꾼 셋째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에 한 목숨 던져
이역만리 중국서 독립운동 중 영양실조와 과로로 사망
"내 정의는 조국 독립이다" 진정한 애국의 길을 보여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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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후손 김만선씨. 김양배 기자 ybkim@jnilbo.com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후손 김만선씨. 김양배 기자 [email protected]

“신의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역사의 대의다. 해가 뜨고 달이 두루 비치니 강과 산이 모두 정연하다.” (독립신문 1921년 1월1일자 ‘신년의 감상’이라는 제하의 일강 선생의 글)

● 영웅의 탄생

천석꾼의 셋째 아들이었다. 비록 나라가 일제의 수탈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처신만 잘하면야 한 생 넉넉하게 지내고도 남았다.

더하여 공부도 오래했다. 어려서는 영광군 묘량면에 있는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8년 영광 광흥(光興)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했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1915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가 1886년 10월 생이니, 29살까지 공부를 이어간 것이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러한 배움을 가질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그였으니 일제의 회유도 끊임없었다. 배운 지식으로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인들을 억누르는데 앞장서라 권유한 것이다.

후손인 김만선씨는 “당시 그 학벌이었으면 어쩌면 자리 하나 크게 했을 수도 있었겠지요”라고 말한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의 가슴에 ‘조국 광복’ 네 글자가 자리를 잡았다.

바로 영광 광흥학교 시절이었다. 광흥학교는 조승찬과 편용무 등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사학이다. 경술국치 후 한일합방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결국 일제에 의해 폐교 조치된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가 배운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이런 마음은 유학 중 조선인들을 2등 국민 취급하는 일본인들을 마주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조선으로 돌아오자 김철 선생은 곧바로 형제들과 상의해 소작인들에게 논과 밭의 일부를 나눠주고 집에 딸린 종들을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줬다. 또한 김정자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일제의 횡포는 도를 넘었고, 고향 산천 곳곳에서는 일본말이 들려왔다. 이름을 바꿔야 하고, 조선과 관련된 모든 것은 금기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홀연히 편지 한통을 남긴다.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기꺼이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

그렇게 그는 중국으로 향한다. 거기에 몇몇의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다. 그가 몸을 열차에 실는 순간, 한 사내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대한민국을 탄생케 한 별들이 상해로 모이는 시점이기도 했다.

● 영웅의 활약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인 하층 노동자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는 등 그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허나 이러한 생활의 곤궁에 굴하지 않고 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등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고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백범일지)

1917년 2월 중국 상해로 도착한 그는 1년여간 독립운동가들과 만나며 1918년 8월20일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 백미로 25호에서 김철은 여운형, 장덕수, 조동호, 선우혁, 한진교 총 6명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기관지인 ‘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조선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1919년 선생은 여운형과 협의한 끝에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독립을 호소토록 했다. 선생은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같은 해 1월 조선에 몰래 들어와 함평(영광)의 전답을 정리해 독립운동자금으로 쓸 1만원을 마련했다.

그 사이 아내인 김정자 여사는 목을 메었다. 아직 새파란 20대의 나이였다. 김철 선생이 상해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좁은 마을에는 일본 헌병들이 들이 닥쳤다. 김 여사는 남편이 자신을 보러 찾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구봉마을 집 뒤에 있는 소나무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지독한 지아비와 지어미였다.

그럼에도 김철 선생의 행보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함평의 모든 재산을 정리한 돈을 들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인 2월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약속 받았다. 이때 3‧1만세운동 거사도 계획했다.

3·1운동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1919년 4월10일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됐다. 곧 이어 임시정부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됐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만드는데 동참했다. 상해에서 조선의 별들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의 인생은 이제부터 하나의 선만을 달려가기 시작한다.

1924년 5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 12월에는 김구(국무령)내각 국무위원,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 1931년 11월에는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 등 항일투쟁의 역사가 바로 그의 삶이었다.

1932년 군무장으로 있을 때는 김구선생과 함께 윤봉길, 이봉창 폭탄의거를 주도했으며 이로인해 항저우로 피신했다. 그리고 여기서 2년 뒤인 1934년 6월 29일 48세의 나이로 영양실조와 과로가 겹쳐 쓰러지고 만다. 급성폐렴이었다. 함평 천석군의 셋째 아들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먹을 것이 없어 위독해진 것이다. 결국 동지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숨을 거두고 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일동(1919. 10) 뒷줄 왼쪽 김철선생. 앞줄 중앙은 안창호) 김철선생 기념관 제공 편집에디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일동(1919. 10) 뒷줄 왼쪽 김철선생. 앞줄 중앙은 안창호) 김철선생 기념관 제공 편집에디터

● 나의 정의는 조국이다

“할아버지의 정의는 간단했습니다. 바로 조국이었지요. 가족을 버리고, 선대의 재산을 다 팔고, 목숨까지 내어 준 조국. 그 분에게 조국 독립은 신념이고, 그의 삶 자체이며, 전부였습니다.” (김만선씨)

인생이 이리 하나의 색이기도 힘들다. 부잣집 아들이었고, 엘리트였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하나도 손에 들지 않았다.

상해의 좁디좁은 임시정부 청사의 침상에 누워 그가 밤마다 그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제 뿐만 아니라, 거기에 빌붙어 같은 민족의 고혈을 빠는 이들에 대한 철퇴와 완전한 자주독립이 아니었을까.

함평에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보고 있노라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조국 독립이 나의 정의요. 그래, 이 목숨 하나와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핏값으로 100년이 지난 지금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셨소? 그랬다면 다행이오.”

정말 다행인가. 우리의 자주독립은 이뤄졌는가. 친일은 사라졌는가. 서늘한 3월의 어느 날이다.

“100년뒤의 대한민국은 자주독립을 이루었소?” 채창민 기자
노병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