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흔(壓痕)

송미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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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에디터

액자의 유리를 닦다 글씨를 본다. 아래로 길게 두 줄로 써내려간 예서체 글씨이다. 스무 개의 정갈한 글씨가 줄을 맞춰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왼쪽 끝자락에는 첫 아이 백일 선물이라는 메모와 날짜, 낙관도 찍혀있다.

 내가 젊은 아낙이었을 때도, 아버지는 그 한시(漢詩)의 내용을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선인(仙人)의 풍류가 나에게는 조금 낯설었다. 한창 내 삶의 울타리를 엮느라 한가로이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연륜에 맞춰 감상의 깊이가 달라지는지 새로운 느낌이다. 친정아버지가 붓글씨를 선물하던 나이가 되니 자연경관의 경이로움에 마음이 끌린다. 얽매이던 일상에서 조금은 놓여난 때어서인지 넉넉한 시정(詩情)을 즐길 수 있다.

 대청마루에 깔개를 깔고, 한지를 올려 서진으로 고정한 다음, 벼루 위에 붓을 얹어놓고 생각에 잠겼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글씨를 써 내려갈 때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했기에, 글자마다 온 정성을 들였을 정성이 느껴진다.

 작품이 완성되고 나면 흐뭇하게 그 글들을 읊조렸던 아버지처럼 나도 한 자 한 자씩 읽어본다.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 스승은 약을 캐러 갔다고 대답하네.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다만 이 산 속에 있으련만,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구름이 깊어서 간 곳을 알길 없구나.

 중국 중당(中唐) 때의 시인 賈島(가도)가 쓴 “尋隱者不遇”(심은자불우)다. 깊은 산과 소나무, 산중에서 자란 약초, 구름이 내려앉을 만한 높은 산 등을 떠올리니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약초를 캐러갔던 스승과 그를 만나지 못해도 초연하게 돌아서는 선인(仙人)의 모습도 선연하다.

 더 이상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남겨놓은 글씨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느낄 수 있어 오달지다. 같은 글씨를 수없이 써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을 텐데 그 글씨를 마주하며 아버지는 얼마나 옹골졌을까.

 ”이 글씨가 조금 매끄럽지 않나요? 내 딸이 사준 ‘진다리붓’ 덕분이지요.”

 이렇게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기뻐했으면 좋았으련만… …

 아버지가 한창 붓글씨에 심취하던 어느 날, 출가한 딸을 찾아 우리 집에 들렀다. 식탁에서 아버지는 ‘진다리붓’으로 유명한 곳이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을 꺼내셨다. 실상 나는 그 붓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그 붓이 얼마나 필요한 물건인지 살피지 않았다. 아버지는 실상 허둥대는 딸이 붓을 사면서 아버지의 취미에 흥미를 갖고 이해하길 바랐을 터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잡다한 일에 휩싸여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버지가 유리를 투시하듯 내 마음을 알아냈다면 나는 나만 보이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의 굴레에 휘둘리다 아버지가 살며시 던졌던 말을 잊고 있었다. 그러저러 시간은 흘러갔고 퇴직을 앞둔 아버지는 쓰러져 병상에서 지내게 되었다. 손놀림마저 온전치 못했다. 구부러진 아버지의 손가락을 보자 아버지가 갖고 싶었던 붓이 퍼뜩 생각났다.

 진다리붓에 대해 알아보았다. ‘진다리’는 이웃 마을의 옛 이름이었다. 비가 오면 땅이 질어 그렇게 불렀다 한다. 그곳 사람들이 만든 붓이 좋아 서예가들이 많이 찾았고 입소문이 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침상에 앉아 글씨 액자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때, 민망한 내 마음을 상쇄할 요량으로 진다리붓을 사드리겠노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힘겹게 저었다. 아버지의 손이 움직여 붓을 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리되면 제일 좋은 진다리붓을 아버지 손에 올려드리려 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식에게 무엇인가 부탁하는 일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알게 되는 나이가 될수록 아버지가 필요한 물건을 제때에 사다드리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기억은 세월 따라 흐려지게 마련인데 죄스러움은 미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만회할 다음 기회가 없었기에 죄송스러움이 깊어졌다. 눌러져 다시 회복되지 않은 압흔(壓痕}으로 남았다. 가끔씩 아쉬움과 그리움이 맴돌다 스러지곤 했다.

 아버지가 尋隱者不遇(심은자불우)의 한시 액자를 선물한 까닭은, 우주변화에 순응하는 자연처럼 부질없는 번민에 얽매이지 말고 가끔은 순리대로 살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산중 소나무 아래에서 스승을 찾던 사람은 다음을 기약하며 미련 없이 훌쩍 돌아섰으리라. 나는 여전히 붓글씨액자를 보며 회한에 젖는다.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한 탓이다.

 액자의 유리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늦둥이는 엎눌렸던 아픔을 훔쳐내고 있다.

※서진=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 쇠나 돌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