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구(埋鬼) 마당밟이

270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편집에디터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매구(埋鬼) 마당밟이

서천국 사바세계 해동조선 전라좌도 면은 쌍봉면 아닌가는/ 삼동리 안중도 아니요 가문은 손씨 날생 가문인디/ 이 터 명당 부귀공명 물론이요 자손 발복도 물론이요 소원성취하시고/ 일년 열두 달이면 삼백육십오일 악살희살 모진 놈의 관재구설은 물알로 일시 소멸하고/ 잡귀잡신은 딸딸 몰아 인천 앞 바다에 쳐 너야것소/ 여 버리고 여기서 잠깐 액을 막는디/ 어~루 액이야 어~루 액이야 에라 중천 액이로구나/ 동에는 청제장군 청박게 청활량/ 석갑을 쓰고 석갑을 입고 석활화살을 매달아놓고/ 공중에서 떨어졌느냐 이 방우 살 막고 예방을 허리요/ 남에는 적제장군 적박게 적활량/ 석갑을 쓰고 석갑을 입고 석활 화살을 매달아놓고/ 공중에서 떨어졌느냐 이 방우 살 막고 예방을 허리요(하략)

여수 삼동 매구 액막이 사설이다. 액(厄)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서는 ‘모질고 사나운 운수’라 풀이한다. 사나운 운수이니 재앙, 불행과 비슷한 말이다. 재앙이나 불행을 막는 사설이니 필시 종교적인 의례나 무속의례에서 사용하는 것이렷다. 각종 무속의례와 무가에서 액막이와 관련된 의례가 있고 여러 노래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설은 ‘농악’으로 범칭 되는 굿놀이의 노래다. 특히 정월 초, 대보름을 전후한 시기에 마을단위로 펼쳐지는 마당밟이 혹은 지신밟기에서 불리는 노래다. 아마 무속의례에서 왔을 것이다. 구성은 판소리의 아니리와 창과 같다. 말과 노래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지역적 특성이 있다.

여수 삼동마을 액막이와 마당밟이

여수 묘도(猫島) 큰 마을을 횡단하는 일군의 풍물패들을 따라가 봤다. 대형 용기(龍旗)가 펄럭이는 뒤편으로 꽹과리와 징, 장구와 북수들이 줄을 이어 등장한다. 수리길굿과 풍년길굿, 등청굿, 길군악이 순서를 기다려 연주된다. 한 판의 놀이 혹은 의례가 끝나고 나면 달집태우기를 한다. 판소리로는 동편제의 고향이요 농악으로는 좌도굿에 해당하는 섬진강의 끝자락, 여수의 한 섬이다. 들어보니 스스로를 ‘매구패’라 호명한다. 매구가 무엇일까? 정초의 마을 액막이와 관련되어 있다. 국어사전에는 매귀(埋鬼)로 풀이한다. 문자 그대로 귀(鬼, 귀신, 도깨비)를 밟아서 땅에 묻는(埋, 시신을 묻다, 메우다 등의 뜻) 행위이자 의례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마당밟이’요, ‘지신(地神)밟기’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마당밟이’라는 용어를, 경상도 지역에서는 ‘지신밟기’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매구(埋鬼)는 마당밟이의 다른 말이다. 농악이니 풍물이니 하는 호명들은 풍장이니 일노래니 하는 ‘두드리는 굿’ 전반을 근대적으로 일컫는 용어일 뿐이다. 전립상모를 쓴 연희자들에게 물어봤다. “이 마을 분들이세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대답을 하신다. “삼동 마을이라요”, “삼동?” “네 그래요 삼동”, “어디 있는 마을이당가요?” 모두 쓴웃음을 짓는다. “옛날에 여수에 그런 마을이 있었지라이”

전립(戰笠)을 쓴 매구(埋鬼)패, 마을을 지켜냈을까?

지금은 없어진 마을이다. 1970년대, 여수시와 여천화학단지 간 전이지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여수 외곽에 있던 삼동마을(구정촌, 외모리, 풍남쟁이)을 비롯해 너댓개의 마을공간에 대한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화학공단이다 보니 환경과 원주민들의 정주 공간에 대한 이해 충돌이 컸을 것이다. 확장 공간이 필요한 산업단지와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간에 발생한 첨예한 갈등은 수몰지구나 공항부지 등에서 일어난 투쟁과 흡사하다. 거대한 공장들이 야금야금 해안과 들과 산을 점유해들어 오다가 급기야는 마을을 포획해버렸다. 몇 가지 물어봤다. 전립(戰笠) 상모 이야기부터 나온다. 전립은 무엇인가? 붉은 털로 둘레에 끈을 꼬아 두른 상모(象毛)다. 조선 시대 무관이 쓰던 모자의 하나다. 이 전립과 여수가 무슨 상관이 있나? 좌수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군사들에게 전립을 만들어 납품하던 수요가 있었다는 것. 전립의 역사를 상고하니 흥미롭다. 왜구에 맞서 나라를 지키던 무관들과 그 복식이, 액을 막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굿거리로 변화했다가, 마을을 위협하는 산업세력에게 맞서는 형국으로 변화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을은 이내 뜯기었다. 여수시에서 마련해준 이주공간으로 정착한 이들은 채 절반도 안 된다.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해마다 정월이면 울리던 꽹과리 소리가 그쳤다. 각종 의례의 중심이던 당산나무도 베어졌다.

배꼽(옴팔로스)을 잃은 사람들, 삼동에서 묘도(猫島)까지

마을을 잃고 나니 허망했다. 대대로 상쇠를 해온 손씨 집안의 손웅(현재 삼동매구 대표)이 앞장을 섰다. 선대에 물어 당산제를 복원했다. 정월 초사흘부터 마을의 당산(堂山) 느티나무에 지내던 의례다. 연중으로 보면 칠석날은 칠석제(칠성제, 진세턱)를 지내던 장소이기도 하다. 도교적 시각이 아니더라도 정주공간을 신체의 확장으로 보는 관념은 보편적이다. 당산나무는 마을의 배꼽에 해당한다. 신체의 배꼽이니 정주공간의 중심이요 세계의 중심이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이 옴팔로스(omphálos)를 중심으로 삼는 관념 또한 보편적이다. 말하자면 배꼽돌이요 배꼽 나무며 배꼽 건물이다. 삼동마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개 1592년 임진왜란으로 추산한다. 밀양 손씨 손연(孫淵)을 입향조로 꼽는다. 충무공 이순신이 군점(軍點)을 취했다는 전봉산(戰鳳山), 신라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는 ‘호랑산(虎狼山)’, 임란 때 낟가리를 쌓아 왜군을 속였다는 적량(積粮)마을 등이 있다. 1986년까지 밀양 손씨 외 경주 김씨, 밀양 박씨가 주축을 이루고 156세대에 이른 마을이다. 2010년에 이르러 여수국가산업단지 확장 공사로 해체되기까지 400여년의 텃자리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여기 태를 묻었을 것인가. 하지만 마을도, 배꼽삼아 의례했던 당산나무도, 의지할 중심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묘도를 택해 마당밟이를 하고 달집태우기를 했다. 없어져 버린 마을 지척이기도 하면서 여수시와 산업단지 내에 마치 여의주처럼 온존하고 있는 섬이 묘도다. 빼앗긴 마을을 대신하는 공간인 셈이다. 해마다 대보름이 되면 묘도에 모인다. 돼지해 올 해도 이곳에 가면 거대한 달집을 태우는 삼동매구패들을 만날 수 있다.

망향의 매구(埋鬼), 대보름마다 꽹과리 울리는 이유

고향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빼앗긴 데가 여수 삼동마을 뿐이겠는가. 거대한 댐을 만들기 위해 수몰되기도 하고, 공항을 만들기 위해 강제 이주 당하기도 한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에는 대개 산업화와 관련된 사례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속에 가라앉건 공장으로 변하건 수백 년 정주공간을 잃어버리는 것,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 옴팔로스, 나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 자기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고향을 잃거나 빼앗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를 향하여 머리를 두어야 할까. 표상된 상실보다 뿌리를 잃어버린 상실감의 무의식을 측정할 수만 있다면, 현대인들의 정신적 부유(浮遊)를 보다 쉽게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농어촌 산간 마을들,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고 폐허가 되어가는 까닭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세기 전까지 우리 인구 2/3의 고향이었던 곳 아니던가. 도시화라는 문명의 이기가 마을, 사실은 우리 마음의 뿌리를 빼앗아 가버렸다. 한국개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228개 시군구 중 소멸위험지역은 2013년 75개(32.9%)에서 2018년 89개(39%)로 증가했다. 지방이 소멸되는 것보다, 거처 없고 뿌리 없는 이른바 망향의 상실감이 더 큰 문제다. 불가항력이긴 했지만 그래도 삼동마을 사람들은 떨치고 일어나 꽹과리와 북장구를 들었다. 고향 가까이 있는 묘도를 택해 마당밟이를 하고 달집태우기를 했다. 여기서의 매구(埋鬼)는 옛것이니 전통의 복원이니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이 묘도에서 회복한 것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빼앗겼던 스스로의 뿌리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올 대보름에는 묘도에 가고 싶다. 그저 망향의 마음들 서로 붙들고 전립 쓴 삼동마을 사람들과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다.

남도인문학 팁

일본의 마을 지키기 사례, 산리즈카(三里塚) 투쟁

우리나라에도 관련 만화가 번역되어 유명해진 곳이다. 일본 지바현 나리타시의 산리즈카와 시바야마(芝山) 주변 이야기다.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과 관련되니 나리타 투쟁(成田闘争)이라고도 한다. 1960년대 초 하네다 국제공항을 확장하기 위해 이곳을 적지로 선정하면서 투쟁이 일어난다. 일본 패망 후 만주국과 오키나와 등지에서 귀환한 농민들의 개척지여서 쉽게 수용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이후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이 참여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투쟁이 격화된다. 1971년에는 경찰 기동대 오천 명이 반대파 농민, 학생들과 충돌한다. 경찰 3명이 숨지고 농민 1명이 자살한다. 1972년 반대 동맹은 활주로 남단에 63미터의 암산대철탑을 세워 반대한다. 대규모 충돌, 지원대 히가시야마 카오루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죽는다. 개항을 앞둔 1978년 3월 반대 동맹이 공항으로 돌입, 관제탑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동차 방화사건도 발생한다. 이런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5월 20일 나리타국제공항은 개항되고 만다. 1995년 내각총리였던 무라야마(일본 사회당)가 반대 동맹측에 사죄한다. 반대파의 많은 농가가 집단 이전에 응하게 된다. 본래 계획은 1970년 개항이었지만 예정보다 8년 늦게 개항했고 두 번째 활주로도 2002년에야 완공된다. 결국, 공항 개항 뒤 50여년이 넘도록 반대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지자체에서는 인구 감소 등 요인으로 나리타공항 제3활주로 건설을 수용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수몰지구나 공항 혹은 산업단지 계획으로 철거당하는 마을과 견주어 볼 사례들이다. 여수 삼동마을도 그 중 하나다. 마을 사람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정주터는 사라져 버렸다. 상고할 점이 있다. 마을 수용을 합리화시키는 명분에 순순히 응한다면 지방 소멸 또한 합리화되고 만다. 그래서다. 꽹과리 들고 북장구 들어 “매구야~”라고 외치는 것은 액을 내치는 소박한 굿놀이를 넘어선다. 우리 사회의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질서를 내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대한 산업자본이 ‘액(厄)’인지도 모를 일이다.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편집에디터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여수 묘도 달집 태우기. 여수시청 제공 편집에디터
여수 묘도 달집 태우기. 여수시청 제공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편집에디터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편집에디터
여수 삼동매구. 여수 삼동매구 손웅대표 제공
여수 묘도 달집 태우기. 여수시청 제공 편집에디터
여수 묘도 달집 태우기. 여수시청 제공
여수 묘도 달집 태우기. 여수시청 제공 편집에디터
여수 묘도 달집 태우기. 여수시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