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흐르는 냇물처럼

유순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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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에디터

일 년이면 딱 두 번 얼굴 보는 아들이 설날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성묘 후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떠났다. 다행히 외할아버지의 묘소 가까이에 있는 나주 불회사 길을 함께 산책하는 시간을 갖긴 했지만, 마음이 허전하긴 마찬가지다. 송정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광주시청 쪽으로 차를 몰았다. 시의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광주천 물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햇볕이 따스하고 미세먼지도 없이 맑았다. 냇물에는 청둥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물놀이를 하고 있고, 가끔씩 흰 쇠백로가 한 마리씩 날아서 물 가운데 고고히 서있다.

냇물에 눈을 팔고 걷다보니 어느새 아들과의 추억이 서려있는 장소에 다다랐다. 몇 년 전 아들이 선배결혼식에 오면서 시간이 없다기에 예식장 근처인 광주천 옆 찻집에서 만났는데, 밖의 경치가 우리를 불러내어 커피를 들고 냇가로 나갔다. 찻길 가에는 연분홍빛 벚꽃이 막 터지기 시작하고, 냇가에는 샛노란 개나리가 물빛에 어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사잇길에서 미소를 띤 아들이 나를 보며 서 있었다. 그날을 추억하며 마냥 걷는데, 갑자기 찬바람이 볼에 스치고 숨을 통해 냉기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얼굴을 감싸는 넥워머를 차에서 깜박 잊고 내렸다. 하지만 차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대로 걸으니 얼굴은 얼얼한데, 정신은 더 맑아졌다.

지난 1월 TV에서 본 모스크바의 러시아정교 신자들이 주현절 전야(1월18일)에 찬물에 들어가는 모습이 생각났다. 예수의 출현을 축하하는 주현절을 기리고 간주(看做)하기 위하여, 신성한 근해나 깨끗한 강 혹은 연못에서 얼음에 구멍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올라오는 의례다. 요르단 강에서 있었던 예수의 세례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외곽 바자이카 강에서 한 남성이 호수에서 나오는 여성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날 기온은 영하 19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차가운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도 보았고, 할아버지가 차가운 물속으로 잠수를 한 뒤 올라오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해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이즈음에는 실수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롭게 가려고 마음먹는다. ‘화 내지 않기, 말 줄이기, ….’ 나이 육십이면 이순(六十 耳順)이라는데, 나는 아직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신경이 곤두서는 육십 대이다. 매년 다짐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다가도 ‘나는 성인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삼기도 한다. 인생은 자기의 결점을 채우거나 고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다 죽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성철(聖哲)스님의 ‘순간에 깨닫고 순간에 닦는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보다는 지눌(智訥)스님의 ‘깨닫고 나서 점점 닦아간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어떤 방법이든 그리스정교 신자들처럼 얼음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난 2018년은 미투 폭로, 갑질 폭로, 남녀대립, 노사대립, 노소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닌,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행동을 한 사람들도 세상에 많이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그동안 그 모욕적인 고통을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 안쓰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갑을이 평등해지기 위해서, 남녀가 평등해지기 위해서, 노소가 평등해지기 위해서, 비리가 없어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세상에 나왔다.

기해년에는 우리사회도 작은 실수는 용서하고 큰 질서는 바로잡아서 좀 더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재(財)를 많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갑과 을, 남과 여, 여와 야, 영남과 호남이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협력하여, 양극화가 약화되고 가슴에 상처받는 사람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쉼 없이 흐르며 스스로 정화하는 저 냇물처럼, 우리사회도 끊임없이 정화하면서 점점 진보된 사회로 나아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