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란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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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성 편집부장 marie@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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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막 필 때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무르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련지에 연꽃이 만개하면 꽃구경하러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첫눈이 내리면 이례적으로 모이고, 또 한 해가 저물 무렵 분에 매화가 피면 다시 한 번 모인다.’ 다산 정약용의 풍류계 죽란시사(竹欄詩社) 규약은 벗들과의 만남도 아날로그 모드다. 살구와 복숭아, 참외, 연꽃, 국화, 그리고 첫눈이라니. 매화는 아마도 설중매겠고.

‘다산은 좋은 계절에 맞춰 꽃이 피면, 가까운 벗들을 초대해 시회(詩會)를 열었다. 그게 이른바 죽란시사'(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였다. ‘여유당전서’에 실린 이 ‘죽란시사첩서’ 규약대로면 200여년 전 지금 이맘 때 어떤 날 다산은 살구꽃 피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살구나무도 매화처럼 꽃이 먼저 피는데 무리지어 있기보다 동네마다 없는 곳 없이 띄엄띄엄 피어 우리네 ‘고향의 봄’은 말 그대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다.

‘청명 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길손 마음 흔들어 놓네/ 주막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목동이 손들어 멀리 살구꽃 핀 마을(杏花村)을 가리킨다.’ 당나라 시인 두목의 ‘청명(淸明)’처럼 연분홍 꽃이 피고 분분히 흩날리는 날이면 살구꽃구경 나섰고 술도 한잔 했을 것인데 술파는 집들 대부분 살구나무를 심어놔 살구꽃이 피는 마을, 행화촌(杏花村)이 곧 술집이다. 죽란시사도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장만해 술 마시고 시를 읊었다. 살구나무와 매화, 벚꽃은 언뜻 분간이 어렵다. 행화촌 찾아 술 한잔 하려면 꼭 알아야 할 것. 살구꽃은 매화와 달리 꽃받침이 뒤로 젖혀져 있고 벚나무와 달리 나무껍질이 세로로 갈라져 있다.

지난 주말 한파를 끝으로 이제 큰 추위는 없다고 한다. 올해는 매화도 빨리 핀다고 하고 광양매화축제 개막(3월8일)도 시작한 지 21년 만에 가장 이르다. ‘여기까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왔지만 여기서부터 나는 시속 1센티미터로 사라질 테다.’ 찬란한 봄은 오고 있고 시인 김선우 말마따나 이제부터 살구꽃 필 때까지 시속 1센티미터로 더디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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