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그리고 친일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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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송희 기자 songhee.kang@jnilbo.com
강송희 기자 [email protected]

지난 9일 광주 친일잔재 조사TF팀의 최종 보고회가 열렸다.

용역 결과 1876년 개항 이후 1945년 8월 해방 직후 사이에 만들어진 비석, 비각, 각급 학교 교가를 비롯해 군사·통치·산업시설 등에 친일 시설물이 광주 도심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TF팀은 일단 가장 논란이 됐던 유형 문화재 일부에 대해서는 고심 끝에 존치 후 교육 목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과거에는 치욕의 역사를 지우자는 입장이 대세여서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존치 후 반면교사 삼자는 것이다.

실제 경제적 침략과 착취의 최선봉에 섰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과 목포지점도 ‘근대역사관’으로 리모델링 돼 오히려 일제 강점기 역사의 현장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유형 친일잔재를 존치한 뒤 친일 인물에 대해 법률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 단죄비를 설치, 올바른 역사 사실을 함께 기술하고 이들에 대해 명예 처벌을 하자는 분위기인 것이다.

치욕스런 역사를 지우기 위해 유형 친일 잔재를 무조건 철거한다면 후세에는 교과서로만 친일의 흔적을 볼 수 밖에 없기에 남겨두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만, 존치와 함께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매 순간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 광주 친일잔재를 취재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친일잔재가 곳곳에 남아있다’는 게 아니라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친일 잔재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했었다’는 점이다.

이번 TF팀에 참여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사실상 이에 대해 제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고, 괜히 말했다가 오히려 문제가 생길까 침묵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그는 “문제제기가 이뤄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많아 이제서야 조사가 이뤄진 내용들이 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진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영화 ‘배테랑’에서 극중 재벌 3세인 조태오가 ‘어이가 없다’ 외에 유행시킨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고 그랬어요”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만약 친일잔재에 대해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광주공원 사적비군에 국난 극복에 힘쓴 권율 장군을 기리는 도원수 충장권공 창의비와 함께 설치된 친일인사인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를 보며 우리는 이들을 공을 인정받은 전남 관찰사로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친일잔재를 이제서야 문제 삼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닐까.

명심하자. 문제제기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역사를 알지도 못한 채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후세에 물려주고, 바로잡아야 하는 기회마저 놓쳤을지 몰랐다는 것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문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강송희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