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iotr, Ilyitch Tchaiko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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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편집에디터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천재 작곡가이자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으로서 불멸의 명성을 남겼다. 설문 조사에 의하면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순위에서 늘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특히 국내 각 지역의 오케스트라 공연 프로그램 중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 피아노 협주곡 1번 B플랫 단조 Op.23, 교향곡 6번 B단조 (비창) Op.74 등의 곡들이 선곡 되었을 때 클래식 팬들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예매를 서두를 정도로 그의 음악은 특별히 한국인들의 정서와 잘 맞는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인데 필자의 사견(私見)도 이와 같다. 말할 수 없이 우울하고 비감스러우나 때론 한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진행은 한(恨)과 질곡의 역사를 견디어 온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어필 된다고 본다. 차이콥스키의 선율적 영감과 풍부한 상상력, 탁월한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법)은 가히 천재적이었으며 당대의 또 다른 거장(巨匠)’프로코피에프’가 제일 부러워했던 재능도 바로 이런 차이콥스키만의 멜로디였다. 현재에 와서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음악의 상징이지만 당대에는 그의 음악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서유럽에서는 그의 음악을 대중적이고 천박하다며 평가 절하했고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피아노,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에 있어서 당시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을 능가하는 획기적 진보를 이뤘는데 이 때문에 그의 피아노,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난해하고 음악형식에도 맞지 않는 형편없는 곡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등은 단순히 연주자들의 기교만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 이상으로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까지 3대(大) 고전 발레 음악은 영원불멸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교향곡 제4번, 제5번, 제6번”비창”, 그리고 거기에 추가하여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 op.58)까지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인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어떤 유명한 평론가는 이런 말을 했었다. “만약 세상에서 러시아가 없었다면 지구상 예술의 절반은 없다고.”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취꼽스키’라고 발음하는 차이콥스키는 명실 공히 러시아 예술의 상징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학교중 하나인 모스크바 음악원은 1940년 이후부터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불린다. 1930년 창단되어 세계 톱 클래스의 오케스트라인 ‘모스크바 라디오 교향악단’ (Moscow Radio Symphony Orchestra)은 1992년 러시아 문화부와 국제 차이콥스키 협회로부터 ‘차이콥스키 교향악단’이라는 칭호를 받은 이래 ‘차이콥스키 모스크바 라디오 교향악단’으로 불리 우고 있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의 우랄 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하였다. 차이콥스키의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비치’는 광산학교를 졸업한 유능한 광산기사로서 1848년에 육군소장 대우의 지위로 퇴직하였는데 그는 연극과 음악을 좋아했으나 본인의 아들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아렉세예브나 앗시르’는 프랑스 혁명 때 러시아에 이민해 온 프랑스인의 피를 받고 태어나 1833년에 일리아 페트로비치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온유하고 착한 성격이었으며 특별한 음악적 재능이 있었는데 차이콥스키는 이런 어머니를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제립(帝立) 법률 학교에 입학한 후 부터 발현되기 시작한 그의 동성애적 성향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으며 끝내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야 만다. 그는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하였고 한때 러시아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잠시 평탄한 인생을 사는 듯 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였고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기 학생이 되어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후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이후 1878년까지 근무하며 작곡활동을 병행하다가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다. 폰 메크 부인은 약 15년동안 차이콥스키를 후원해 주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서로의 실물을 본 것은 오직 2~3번뿐이라고 한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의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한 후 그 해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차이콥스키 죽음의 미스터리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신 후 감염된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는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둘러싼 전혀 다른 온갖 의혹과 소문들이 파다했다. 그러던 중 1979년 러시아의 음악학자 ‘알렉산드라 올로바’ (Alexandra Orlova)가 제시한 여러 가지 충격적인 증거들로 인해 세상은 발칵 뒤집어지게 된다. 차이콥스키가 당시 황제의 시종무관으로서 최고의 실력자였던 ‘스텐보크 페르모르’ 백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이것을 알아차린 백작이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고소했으며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사형 또는 종신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이 고소장을 접수한 검찰 부총장이자 차이콥스키와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1893년 10월 30일에 자신의 서재에서 8명으로 구성된 이른바 ‘명예 법정’이라는 이름의 비밀 법정을 연 끝에 자살 형을 선고했다는 내용들이었다. ‘올로바’가 내놓은 구체적인 증거들은 검찰 부총장의 미망인의 증언 들을 토대로 제시되었으며 차이콥스키의 부검결과 그의 몸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것은 당시 콜레라 감염의 증거로 언급되었던 쌀뜨물 같은 설사가 비소를 먹은 경우에도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에 이 같은 독살설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리 차이콥스키정도의 업적과 인지도 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동성애는 사형은 겨우 면할지 모르지만 최소 종신형을 선고 받을 만한 범죄였기 때문에 그의 명예는 회복될 수 없이 실추될 것이며 동성애자로서 죽는다면 장례조차 제대로 치루지 못할 것을 우려한, 말하자면 법률학교 동기들의 마지막 배려였다고 것이다. ‘올로바’ 주장의 결론은 차이콥스키는 강요에 의해 스스로 비소가 든 물을 마시고 4일 만에 사망했다는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주장은 점차 확정적 사실로 굳어져가고 있으며 정황상으로나 수많은 증거로 보아 차이콥스키는 자살했을 것으로 믿는 사람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차이코프스키 죽음은 음악사의 커다란 의문으로 남아있으며 그의 시신은 러시아의 저명한 인물들이 잠들어있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안치돼 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차이콥스키의 작품은 충분히 표현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며 화려하게 다가왔지만 또한 너무나 대중적이고 천박 하다는 정 반대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나기 시작한 절망감은 후기로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시대 가장 위대한 교향곡 가운데 하나인 제6번 교향곡 ‘비창’에서는 그 절정에 이른다. 이 곡은 1893년 10월 28일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오케스트라의 단원들과 청중들은 이 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 직후 11월 6일 돌연 그가 사망하고 11월 18일 열린 추모음악회에서 「비창 교향곡」이 다시 연주되었을 때 청중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연주회장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제6번 교향곡 ‘비창’의 4악장은 서서히 선율이 사라지는 다소 예외적인 종지로서 끝난다. 종지부의 선율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부분은 마치 촛불이 꺼져 가는 듯이, 인생의 끝을 알리듯이 숙연하고 비통하다.
나는 좀 젊었을 때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과 5번을 특별히 좋아했다. 에프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 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와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Vladimir Fedoseev)가 지휘한 ‘차이콥스키 모스크바 라디오 교향악단’ (Tchaikovsky Moscow Radio Symphony Orchestra)의 연주를 그때는 수도 없이 들었었다. 인생의 온갖 고난과 부조리와 불합리에 저항하여 끝내 승리하는 피날레는 언제나 큰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요즘은 제6번 교향곡’비창’과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 op.58)을 많이 듣는다. 내가 어리석은 사람 이다보니 인생의 끝은 승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구원으로서만 온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조차 최근에야 겨우 얻게 되었다. ‘비창’교향곡 종지부의 선율이 서서히 사라지듯 모든 인생의 마지막은 그토록 가냘프고 숙연할 것이라는 데서 생각은 멈췄다. 오늘밤도 ‘비창’과 ‘만프레드’를 들으면서 몇 글자 적어가다가 갑자기 차이콥스키의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음악과 그 비극적인 운명이 너무 가슴 아프고 이 별 볼일 없이 고단하기만 한 내 인생도 너무 짠해서 마음속 가득 밀려드는 처연함은 도무지 그치지를 않는다.

차이콥스키 청년시절 편집에디터
차이콥스키 청년시절
차이콥스키 편집에디터
차이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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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데즈다 폰 메크 편집에디터
나데즈다 폰 메크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 편집에디터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
모스크바방송 차이콥스키 교향악단 편집에디터
모스크바방송 차이콥스키 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