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 김홍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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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재 광주시립교향악단 지휘자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
김홍재 광주시립교향악단 지휘자 박상지 기자 [email protected]

마에스트로 김홍재
마에스트로(Maestro)는 예술가, 전문가에 대한 경칭(敬稱)으로 특히 서양 클래식 음악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음악 감독, 스승을 의미하는 단어로 우리말로는 거장(巨匠)이라고 표현한다. 클래식 세계에서 오케스트라를 소개할 때는 누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인지가 매우 중요하고 이것은 곧 오케스트라의 브랜드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마리스 얀손스’ (Mariss Jansons)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얍 판 츠베덴’ (Jaap Van Zweden) 의 뉴욕 필하모닉 (New York Philharmonic),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의 시카고 심포니(Chicago Symphony Orchestra), ‘파보 예르비'(Paavo Jarvi)의 NHK교향악단(NHK Symphony Orchestra)이다. 나는 지금부터 마에스트로 김홍재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광주의 클래식 팬들조차 그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없다보니 그가 얼마나 훌륭한 지휘자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또 워낙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이고 TV나 신문 인터뷰조차 꺼리는 사람이라 지역에서의 브랜드화를 위해서는 누군가 주변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2016년 김홍재가 광주시향의 지휘봉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광주시향의 브랜드 향상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한국 클래식계의 통설이다. 특히 그는 무려 400여곡이 넘는 엄청난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오케스트라 연주곡 중 교향곡이나 협주곡 스코어의 책 두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 양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명실 공히 국내 톱클래스의 지휘자인 그는 명확하고 치밀한 곡해석이나 칼 같은 바톤(Baton) 테크닉도 월드 클래스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지휘자다. 거장(巨匠) 세이지 오자와가 “너의 지휘는 대륙적이다.”면서 늘 인정해주던 제자였다.
지휘자의 역할이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말하자면 대체 불가의 중요성을 가진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물론 아무리 훌륭한 지휘자가 지휘한다 하더라도 오케스트라의 기본적인 수준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마법을 부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오케스트라가 낼 수 있는 최상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휘자의 몫이다. 오케스트라는 기계가 아니고 생물(生物)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실력에다 좋은 인품까지 갖춘 지휘자를 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확률이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대한민국의 문화수도를 지향한다는 우리 광주시의 대표적인 문화 예술적 인적(人的) 자산이며 대외적 자랑거리로서 가치가 충분한 인물이다. 그가 2016년 광주시향으로 자리를 옮길 때의 일이다. 9년 동안 지휘했던 이 전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시청을 찾아가 지휘자가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을 하였고 이에 울산시장(市長)은 보다 나은 계약 조건을 다시 제시하였지만 그는 광주행을 변경하지 않았다. 본래 물질에 큰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어차피 조건 때문에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제자로서 ‘광주여 영원 하라’ 를 일본에서 초연하였고 그 외에도 수많은 윤이상의 작품들을 그의 손으로 지휘하면서 ‘광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설레임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광주행을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북 화해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양국립교향악단을 수차례나 객원 지휘했던 그의 경력이 적절하게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윤이상 선생이 살아생전에 김홍재의 지휘를 평가했던 말이다. “김홍재의 지휘는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고 신비적이다. 활력 있는 기교와 감성을 갖춘 지휘자다.”
비정치적(非政治的)성향의 성실한 원칙주의자
김홍재는 1954년 일본 효고현에서 민족학교 교원인 부모아래서 태어나 일본학교를 다니지 않고 민족학교를 다니면서 성장했다. 아주 어릴 적 동네에서 유일하게 피아노가 있던 외할머니 댁에서 피아노를 배우던 김홍재는 형과 피아노를 치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일본에서 정식 학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민족학교를 졸업한 그가 들어갈 수 있는 학교는 일본에서 한 군데 밖에 없었다. 일본 최고의 명문 사립 음대인 도호학원 음악대학(桐朋学園大學音楽部)이었다. 도쿄에서 부잣집 아이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학교에서 제일 가난한 조선적(朝鮮籍)학생 김홍재는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를 만난다. 혈통주의 일본사회에서 아무런 배경이나 주변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그는 1979년 세계적 권위의 제14회 도쿄 국제 지휘자 콩쿨에서 2위와 ‘사이토 히데오’ 특별상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일본의 클래식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김홍재는 조선적의 무국적자 출신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중 실력은 최고였지만 1위를 못했었고 오히려 1위 입상자 대신 특별상인 ‘사이토 히데오’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사실상의 1위였음을 인정하는 일본 클래식계의 마지막 양심에 따른 결과였다.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의 개막지휘는 당연히 일본이 낳은 거장(巨匠) ‘오자와 세이지’가 맡았지만 바로 이어 열린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의 개막 지휘는 김홍재에게 기회가 왔다. 무국적자 조센징이 올림픽 개막식에서 일본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이후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2000년 아셈(‘아시아-유럽정상회의(Asia-Europe Meeting)’ 회의 전야제 음악회의 지휘를 위해 입국하게 되고 처음으로 한국의 오케스트라(KBS교향악단)를 지휘하게 된다.
그는 내 주변에서 내가 아는 한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지휘자 군(群) 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항상 안타까운 것은 전 세계를 막론하고 정치적이지 않은 지휘자가 크게 성공하는 경우를 지금까지 거의 본 적이 없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이루어 낸 기적 같은 업적들은 오로지 그의 탁월한 음악적 능력과 피나는 개인적 노력에 의한 것임이 틀림없다. 조센진으로 불리 우며 온갖 불이익들을 감수하면서도 오랜 세월 무국적자의 신분을 고집했던 전력(前歷) 등, 말하자면 그 비정치적인 성향은 어떤 신념 같은 것이고 그로 인한 여러 가지 고난의 감수는 자발적인 선택이 맞다. 한 가지 예로 ‘오자와 세이지’가 미국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을 때 일이다. ‘오자와’는 제자였던 김홍재를 두 번씩이나 세계적 교향악단인 보스턴 심포니의 어시스던트 지휘자로 초청한 적이 있었으나 그의 무국적자 신분은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았다. 이때도 김홍재는 끝내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계 클래식계의 중심지에서 자리 잡고 발돋움할 수 있는 인생 최대의 기회를 스스로 날린 것이다. 당시 본인 자신의 마음속 갈등이야 훨씬 더 했겠지만 그의 전체 인생에서 이 대목은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픈 부분이 아닌가 한다.
김홍재는 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매우 바쁘게 짜여있는 연주회 편일정과 함께 매일 똑같은 생활 패턴을 놀라울 정도로 꾸준하게 유지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은 공연해야 할 스코어를 읽는데 보내고 때때로 산책을 하고 담배를 자주 피우며 음주를 즐기는 편이다. 술이 들어갔을 때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말이 없고 매우 조용한 사색적인 성품이다. 그는 부당한 일에 있어서는 본인의 거취에 전혀 연연하지 않으며 언제나 결연히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정(人情)이 아주 많은 편이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가 지휘했던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단 한번이라도 함부로 대한다거나 무시하거나 강요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자신에게는 엄격하나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이다. 아주 오래 전 그가 어느 방송국과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음악회가 있는 날은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못 가본다. 자식이 죽느냐 사느냐 해도 그날은 못 돌아가고 이 음악회를 해야 한다는 각오로 사는 사람이니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한다.” 이렇게 프로 데뷔 후 40년의 세월을 단 한 번의 캔슬, 단 한 번의 지각이나 결석조차 없이 철저하고 지독하게 음악을 대하는 일관된 그의 삶을 엿보면서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홍재는 10여 년 전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이제는 그가 ‘마음의 고향’ 광주에서 온전히 자신의 음악만을 하면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를 기원하며 그렇게 거장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다가 정해진 때가 되면 명예롭게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에디터

젊은 시절 김홍재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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