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의 대표 정자 영모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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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정은 1520년 귀래정 임붕(歸來亭 林鵬, 1486~1553)이 건립한 정자로 나주 회진출신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편집에디터
영모정은 1520년 귀래정 임붕(歸來亭 林鵬, 1486~1553)이 건립한 정자로 나주 회진출신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편집에디터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을 바라보고 있는 영모정

영산강 주변에는 꽤 많은 정자들이 영산강을 향하여 들어서 있다. 호남문화연구소가 1985년부터 1991년까지 7년에 걸쳐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전남의 누정은 모두 1,687개소에 이른다. 그 가운데 638개소가 조사당시까지 현존하고 있었고 나머지1,049개소는 현존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안타깝게도 사라져버린 누정이 현존하는 누정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영산강이 관통하고 있는 나주의 경우만 해도 현존누정이 59개소이고 부존누정이 106개소에 달한다.

그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된 현존 누정으로 영모정(永摹亭)을 비롯하여 쌍계정(雙溪亭), 만호정(挽湖亭), 석관정(石串亭), 장춘정(藏春亭), 양벽정(樣碧亭), 탁사정(濯斯亭)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누정입지나 주변 숲, 영산강 조망경관 등이 양호한 영모정은 영산강을 대표하는 누정 가운데 하나이다. 영모정은 1520년 귀래정 임붕(歸來亭 林鵬, 1486~1553)이 건립한 정자로 나주 회진출신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임제는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지냈으며 당시의 혼란스런 정국을 비판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예술적이고 호방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간 조선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사상가로 손꼽힌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일화와 문학작품에 그의 거침없는 성품과 낭만적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 황진이(黃眞伊, 1506년∼1567년 추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詩)는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1583년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발령을 받아 가는 길에 송도(松都)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쳣난다/잔(盞) 잡아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청구영언 수록)’

황진이가 임제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인에 대한 애정표현이라기보다는 그의 반봉건적 성향과 남녀평등사상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또 있는데 영모정 뜰 비석에 새겨진 그의 유언으로 전해지는 ‘물곡사(勿哭辭)’이다.

‘주위의 모든 나라가 황제라 일컫는데/유독 우리나라만 중국에 속박되어 있으니/내가 살아 무엇을 할 것이며 내가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랴/곡하지 마라.(나주 임씨세승 수록)’

임제는 기존의 사대부 인물들과는 달리 체면과 권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천한 신분이라도 자신이 본받을 만하다고 여기면 존경을 표하기도 하고 정치적인 소신도 마음먹은 대로 피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백호선생은 기질이 호방하여 구속 받음이 없었다. 병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아들들이 슬피 부르짖음에 위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진면모는 ‘화사(花史)’라는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화사는 식물세계를 의인화하여 창작한 한문소설이다. 철따라 피는 꽃, 나무, 풀들의 세계를 나라와 백성과 신하로 삼아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를 통해 인간세상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토로하고 꽃의 성실성과 정직성을 예찬한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이치를 정원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자연에 대한 관찰력과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영모정은 초기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이라 불렀으나 1555년에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모(永摹)는 ‘길이길이 뜻을 기리다’는 뜻으로 조상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담아 그 뜻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자 바로 아래에는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원경(遠景)으로는 맞은편의 가야산(189m)이 조망된다.

가야산은 인근 주민들이 산책공간처럼 즐겨 찾는 곳인데 여기에 팔각정과 앙암정(仰巖亭)이 있다. 앙암정 아래에는 백제시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서 깊은 바위가 있다.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앙암바위 인근에는 진부촌이 있었고 맞은편에 택촌(현재 삼영동)이 있었다.

하루는 택촌에 사는 아랑사라는 청년어부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는데, 건너편에서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다가가보니 진부촌에 사는 아비사라는 처녀였다.

그녀는 몸져 누워있는 홀아버지에게 물고기를 잡수시게 하고 싶어 강가에 나왔으나, 좀처럼 물고기가 잡히지 않자 막막하여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랑사는 그녀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며 남자다움을 과시했다.

이것이 인연이 된 두 사람은 밤마다 앙암바위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갔는데 이를 시기한 인근마을 젊은이들이 아랑사를 꼬여 앙암바위로 유인해 바위 아래로 떨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후로도 아비사는 아랑사를 그리워하며 앙암바위를 찾곤 했는데 어느 날 마을 젊은이들이 가보니 강에서 바위를 타고 올라온 커다란 구렁이와 아비사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젊은이들은 이를 나쁜 징조라 여겨 그들을 바위 아래로 굴려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후부터 진부촌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앓다 하나 둘씩 죽어갔고, 두 마리의 얽힌 구렁이가 밤마다 진부촌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마을노인들이 예삿일이 아니다 싶어 마을회의를 소집해 음력 8월에 씻김굿을 해 그들의 넋을 위로하게 되었고 그후로는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일도 구렁이가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전설이 탄생한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영산강과 주변의 바위, 나무 등에 서린 유서 깊은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영산강이 지역주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영산강 풍경을 오랜시간 동안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영모정은 현재 후손들이 조상의 뜻을 기리는 재실(齋室)로 활용하고 있어 문중사람들에게는 공동체정원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인근 주민들에게는 마을정원으로, 어린이들에게는 자연놀이터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지나가는 길손들이 잠시 차를 멈춰 세우고 한 숨 돌리는 쉼터로서도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영모정은 영산강과 가야산, 그리고 주변 전원풍경을 정원(庭園) 삼아 지은 자연풍경식 정자이다. 담장도 없고 대문도 따로 없다. 마치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을숲처럼 자연스런 풍경을 만나게 된다.

사실 겨울철에는 꽃도 구경할 수 없고 단풍도 볼 수 없어서 아무리 아름다운 정원도 뭔가 허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영모정의 초겨울 풍경은 잘 자란 노거수와 아직 푸릇푸릇한 지피식물 덕분인지 그 실루엣마저도 정겹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영산강이 있어 영모정이 빛을 발하고 영모정이 있어 영산강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영산강은 남도의 대하소설 그 자체이다.

영산강은 영모정 바로 앞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심지어 귀 기울이면 찰랑이는 물결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지척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여느 강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지만 예전에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적지 않은 배들이 왕래했을 것이고 또 주민들의 수렵장면들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흔히 영산강을 ‘남도의 젓줄’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풍요로운 남도 땅의 생명줄 역할을 톡톡히 해왔기 때문이다.

‘전라도’라는 지역이름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 1018년(고려현종 9년)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때 지금의 광역지자체 격인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되었던 나주는 영산강과 따로 떼어 말하기 어려운 관계이다. 우리나라 먹거리를 책임졌던 곡창기능은 말 할 것도 없고 마한역사를 대변하는 반남고분, 영산강의 대표적인 나루터 영산포와 홍어 이야기, 장어를 생각나게 하는 구진포(九津浦) 등을 품고 있는 영산강은 한편의 대하소설(大河小說)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도 바뀌고 자연도 변했지만 영산강은 남도역사를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담양 용소에서 시작한 작은 물줄기는 광주광역시를 거쳐 장성 황룡강과 합류하여 다시 나주, 함평, 무안, 영암, 목포를 지나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영산강의 옛 이름은 금천(錦川)·금강(錦江)이었고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이라고 불렀다. 고려 때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영산도((榮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유래가 되어 영산포(榮山浦)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그 때 이주하는 과정에서 발효식품의 대명사인 홍어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 초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榮山江)으로 바뀌게 되었다. 1976년에 나주댐·담양댐·장성댐이 완공됨에 따라 하상(河床)변화와 유량(流量)감소 등으로 하류수위가 낮아져버렸다. 또 1981년 12월에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면 나불리 사이에 영산강하구둑이 완공되는 바람에 물은 해수(海水)에서 담수(淡水)로 바뀌게 되었다. 예로부터 수운이 발달해 목포와 영산포 사이를 많은 배들이 왕래했었으나 1977년 10월 마지막 배를 끝으로 수운기능이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4대강사업 일환으로 2012년 5월에 준공한 승촌보와 죽산보는 물의 흐름과 물고기 왕래를 더욱 제한하게 되었다. 영산나루터를 비롯한 많은 나루터들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활력 넘치던 영산강은 침묵의 강으로 변해버렸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성서에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형통함(시편1:3)’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를 물(水)에 비유하며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물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물이 언제나 역동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다. 물은 반드시 흐르게 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고대중국이나 조선시대에도 물은 인간의 영적, 육체적, 감성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에서 풍수학(風水學)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영산강을 이용만 했지 영산강을 얼마나 아껴왔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영산강의 속내를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심경을 대변하며 만들어진 대중가요가 있다. 바로 정진성이 작사 작곡한 ‘영산강아 말해다오’이다.

‘굽이굽이 뱃길 따라 님 계신 곳 왔건만은/님은 가고 물새들만 나를 반겨 우는구나/님 계신 곳 어디메냐 님 보낸 곳 어디메냐/말을 해다오 말을 해다오/영산강아 말을 해다오.’

하지만 여전히 영산강은 말이 없다.

영모정은 1520년 귀래정 임붕(歸來亭 林鵬, 1486~1553)이 건립한 정자로 나주 회진출신의 명문장가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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