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온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블레이즈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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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수 기자 sspark@jnilbo.com
박상수 기자 [email protected]

전쟁 포화 속에서 1000명의 고아 구출

블레이즈델 공군 대령의 헌신적인 사랑

우리는 잘못 알고 엉뚱한 사람 영웅 대접

광주 충현원 뜰에 동상 세운 유혜량 원장

‘한국 전쟁고아 역사박물관’ 건립이 꿈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기에 처했다. 미국 제5공군 부대가 모두 철수했으나 서울 고아원에는 그들이 돌보던 1087명의 고아와 직원들이 남아 있었다. 5공군 부대 군목인 러셀 블레이즈델(Russell L. Blaisdell ) 중령은 한국 공군이 3000포의 시멘트를 인천에서 제주도로 보내기 위해 상륙용 수송선을 준비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을 그 배에 태워 보내기로 하고 인천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선박은 작고 파손돼 아이들을 태울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8명의 아이가 백일해와 홍역 등으로 사망했다.

블레이즈델은 서울의 5공군 부대를 다시 찾아 작전 책임자 T. C. 로저스 대령에게 급박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로저스는 공군사령관을 대신해 C-54기 16대가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도록 명령했다. 블레이즈델은 미 해병대 트럭의 도움을 받아 고아들을 인천에서 김포공항으로 긴급하게 옮겼다. 약속 시각인 오전 8시를 2시간이나 넘겼는데도 화물 수송기는 기다리고 있었다. 1000명이 넘는 고아들은 12월 20일 기적적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고아들은 딘 헤스(Dean Hess) 중령이 마련한 농업학교에 수용돼 안전하게 성탄절을 맞았다. 이른바 ‘유모차 공수 작전(Operation Kiddy Car)’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성공했다.

블레이즈델은 회고록 ‘1000명의 아버지(Father of a Thousand)’에서 “내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1000여 명의 생명을 구출한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한 책임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일로 고초도 겪었다. 상관의 명령 불복종 및 미군 인력과 경비를 무단 사용한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정상이 참작돼 처벌받지 않고 일본으로 재배치되고, 뒤에 대령으로 승진한다. 일본으로 가는 그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딘 헤스 중령이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해 마음이 놓였다고 회고한다.

제주도에서 고아들을 돌보던 딘 헤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대령으로 예편한 뒤 1956년 한국전쟁의 경험을 담은 책 ‘전송가(戰頌歌·Battle Hymn)’를 펴낸다. 이 책은 이듬해 더글러스 서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할리우드의 스타 록 허드슨이 주연을 맡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된다. 이 책과 영화에서 헤스는 한국전쟁 고아 구출 작전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구상하고 실행했다고 주장한다. 제5공군의 패트리지 사령관도 이 영화에 출연해 헤스를 위대한 군인이라고 증언했다. 이 영화는 국내에도 개봉됐다. 영화의 영향 탓일까. 이후 딘 헤스는 한국전쟁 항공전의 영웅, 초창기 한국 공군의 대부, 전쟁고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았다. 특히 전쟁고아를 구출한 공적으로 1951년과 1960년 대한민국 무공훈장을 수훈했다. 1962년에는 소파상도 받았다. 한국 전쟁기념관을 비롯해 공군역사박물관 등에도 고아 구출의 영웅은 딘 헤스로 기록돼 있다.

한국 전쟁고아 구출 작전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블레이즈델과 로저스, 딘 헤스 등이 모두 영웅이다. 그중에서도 블레이즈델의 헌신적인 희생이 돋보인다. 딘 헤스를 고아 구출의 영웅으로 묘사한 영화 ‘전송가’가 개봉되자 블레이즈델의 부관으로 고아 구출 작전을 함께 한 마이클 스트랭 상사는 크게 분개한다. 그는 블레이즈델에게 편지를 보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블레이즈델은 “그 영화의 수익금이 한국 고아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때 대응하겠네. 지켜 보세.”라고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다. 1952년 한국전쟁에 육군 정찰병으로 참전해 고아 구호 활동을 했던 조지 F. 드레이크 박사는 “딘 헤스는 고아 구출 작전을 계획하지도, 지휘하지도, 목격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그것을 지연시키려고 시도한 장본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딘 헤스가 모든 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내세운 것은 민망할 뿐만 아니라 명백한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블레이즈델 대령이 광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사회복지법인 충현원 가족들을 만나고부터다. 충현원은 여순사건으로 남편을 잃고 27세에 홀로 된 박순이 선생이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젖먹이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양림동에 건립한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보육원이다. 1995년 박순이 원장 타계 후 며느리인 유혜량 원장이 시설을 이끌고 있다. 유 원장 가족들은 2005년 5월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미국 병사들과 한국 아이들-그들의 사랑 이야기’ 사진 전시회에서 블레이즈델 대령을 처음으로 만난다. 블레이즈델은 그 후 미국 남장로교 박물관에서 박순이 선생의 자료를 발견하고 전쟁 상황 속에서 고아들을 돌본 충현원의 설립자 정신이 자신의 생명 존중의 뜻과 같다면서 회고록의 한국어 판권을 유 원장에게 기증하고 2007년 5월 97세로 소천했다.

유 원장은 전쟁고아를 구출한 생명 존중 사상에 감명을 받아 블레이즈델 대령 선양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2008년 그의 한국어판 회고록 ‘전란과 아이들-그 일천 명의 아버지'(2011년 ‘1000명의 아버지’로 제목을 바꿔 재판 발행)를 출간했다. 2009년 12월에는 충현원 뜰에 블레이즈델 대령의 추모 동상을 건립했다. 지난 20일에는 한국 전쟁고아 구출 작전의 역사 왜곡 과정을 밝힌 책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러셀 블레이즈델’을 다시 펴냈다. 블레이즈델은 가고 없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오롯이 광주에 머물고 있다. 유 원장은 사실을 왜곡한 ‘전송가’ 대신 진실을 담은 영화가 다시 제작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전쟁기념관과 역사 교과서 등에도 한국 전쟁고아 구출의 역사가 정확하게 기록돼야 한다는 게 유 원장의 입장이다.

정치학 박사이고 목사인 유 원장은 광주에 ‘한국 전쟁고아 역사 박물관 및 해외 입양 한인 문화체험센터’를 건립하는 것이 꿈이다. 충현원은 현재 한국 전쟁고아 관련 사진과 자료 8387점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에 전쟁고아 박물관이 건립되면 관련 자료를 추가로 기증하겠다는 미국인들이 많다고 한다. 유 원장은 “충현원 개원 당시의 고아원 건물들을 체험관으로 복원해 20만 명이 넘는 해외 입양 한인들이 모국을 방문해 상처를 치유하고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친정집 같은 공간을 만들겠다.”며 의욕에 차 있다. 광주에 ‘한국 전쟁고아 역사 박물관’이 들어선다면 또 하나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훈처도 이 사업에 공감하고 국비 지원을 약속했다고 한다. 광주시가 서둘러 보훈처와 협의를 했으면 한다. 내일은 가난한 자, 병든 자, 버림받은 고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이다. 아쉬움 속에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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