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과 덕봉의 삶의 향기 그윽한 연계정을 산책하다.

담양 연계정과 미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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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정과 미암일기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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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眉巖日記, 보물 제260호)는 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신인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직접 기록한 친필일기이다. 1567년 10월부터 1577년 5월까지 대략 10여 년간에 걸쳐 기록한 것으로 현존하는 개인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개인의 일상적인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다양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희춘과 그의 아내 송덕봉 사이에 알콩달콩 전개되는 부부이야기, 기개(氣槪) 넘치는 문학세계 등은 한편의 멋들어진 드라마를 감상하는 듯하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1592년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불타 없어진 바람에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72)의 논사록(論思錄) 등과 함께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을 만큼 사료(史料)적 가치도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이곳에 가면 마치 타임캡슐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설렘을 안고 찬찬히 산책을 하게 된다. 이곳은 노루뫼(獐山)라는 뒷산 덕분에 일명 ‘노루골’이라고 불리고 있는 담양군 대덕면 장산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족히 500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마치 팔을 벌려 환영하듯 가장먼저 반겨준다. 조금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좌측 언덕배기에 연계정(漣溪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연못을 내려다보며 다소곳이 앉아있다. 연못주변에는 노거수들이 에워싸고 있고 그 실루엣이 연못에 반사되어 한껏 운치를 더해준다. 연못 안 쪽에 있는 작은 건물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끄는데 다리를 통해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아담한 석조건물은 이 정원에서 풍경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미암일기를 비롯한 유희춘의 유물을 보관했던 모현관이다. 지금은 인근에 미암박물관을 건립하여 각종 관련유물을 전시•관리하고 있다. 모현관은 1959년 후손들이 미암일기를 보관하기 위해 석조로 지었는데 독특한 양식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화순에서 소달구지로 화강암을 실어오고 광주의 유명 석공들이 참여하여 돌을 다듬었다고 전해진다. 건물 정면에 ‘慕賢館'(모현관)이라고 새겨진 글씨는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이 썼다고 한다. 모현관을 감상한 후 연못 한 바퀴를 돌아 연계정에 오르면 연못과 마을숲, 마을뒷산까지 근경과 원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연계정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 반으로 좌측 1칸과 전면 쪽마루를 두었으며 우측 2칸은 내실로 이루어져 있다. 개항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장성출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연계정중건추기(漣溪亭重建追記))에서 일구계정(一區溪亭)이라고 적고 있어 정자 앞으로 물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연계정의 용도는 독수정 14경(景)을 지은 바 있는 완산 이광수(完山 李光秀)의 근서(謹書)를 통해 알려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연계정은 문절공 미암 선생이 도(道)를 가르치던 곳이다. 대개 선현(先賢)의 발자취가 있는 곳에는 모두 비를 세우거나 누각을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곳에서 쉬고 이곳에서 거처하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또 이 정자에서 도를 강론하였으니 후학(後學)들이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정자의 흥폐로써 깊고 얕음이 있으랴.’ 이 내용으로 보아 정자의 기능이 쉬고 거처하기도 하는 별서정원으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고 또 후학들을 가르치는 배움터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당시의 정자와 정자이름, 그리고 연못풍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정자는 추성(秋成:담양)고을 남쪽에 있는데 사방으로 산이 솟아 있어 푸르고, 골짜기 물이 난간 앞에 괴어 못이 되고 또 졸졸 흘러서 시냇물이 되었는데, 시내 이름이 연계(璉溪)이므로 선생이 그때 정자의 이름을 이 시내 이름에서 딴 것인지 또는 시내 이름이 정자로 인하여 붙여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 선생의 자호(自號)가 연계이므로 시내와 정자가 모두 선생의 호를 따라 이름이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선생의 문집 중에 혹은 연계권옹(璉溪倦翁)으로 칭한 것도 있으니 이에 의하면 자호(自號)도 또한 꼭 그러하다고 볼 수 없다. 정자는 병란에 무너지고 선생의 유고(遺稿)도 유실되어 자손이 그 유허(遺噓)만을 지키니 사방 선비들은 다만 선생의 정자 터만을 알 따름이다.’ 라고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전하고 있다. 한편 실제 미암은 1575년 12월18일자 일기에 집 앞에 흐르는 냇가를 ‘연계(漣溪)’라고 이름 지은 대목이 나온다. 이 정자는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는데 이를 안타까워하던 차에 문인들 90여명이 힘을 모아 다시 세웠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희춘은 1513년에 해남 외가에서 유계린(柳桂隣)과 탐진 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계린은 ‘표해록(漂海錄)’으로 유명한 장인 최부와 순천으로 유배 온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선비였으나 최부와 김굉필이 1504년 갑자사화로 희생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평생 처사로 살았다. 어머니 탐진 최씨는 강직한 선비 금남 최부(錦南 崔溥, 1454∼1504)의 장녀이다. 유희춘의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인데, 미암이란 호는 그가 해남 금강산(582m) 남쪽 기슭에 살았을 때 뒷동산 바위가 미인의 눈썹처럼 생긴 것에 착안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유희춘은 송정순의 물염정(勿染亭)에서 하서 김인후(1510∼1560)와 함께 최산두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536년 24세때 담양출신인 당시 16세였던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을 아내로 맞이했다. 송덕봉은 여류시인으로 담양 대덕에서 태어났다. 송씨는 ‘덕봉집(德峯集)’이라는 시문집(詩文集)을 남길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미암의 학문에 매료되어 결혼을 결심했던 송덕봉은 유난히 키가 작은 미암과의 혼인을 가족들이 반대하자 버선을 도톰하게 신고 오도록 일조했다는 일화는 우리를 웃음 짓게 한다. 유희춘과 송덕봉은 부부로서뿐 아니라 때로는 학문적 동지로 소통하면서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미암일기는 기록의 달인 남편 유희춘과 시대를 초월한 기품 있는 아내 송덕봉이라는 부부를 통해 드라마틱한 한 시대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해준다. 미암일기를 보다 실감나게 느끼기 위해서는 그 중심 무대였던 연계정, 유희춘과 송덕봉이 살았던 집, 미암일기를 보관했었던 모현관, 그리고 최근에 들어선 미암박물관 등을 두루 산책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조선의 진정한 로맨티스트 송덕봉을 아시나요?
조선시대 여성들의 경우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강한 유교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학문이나 활동영역 등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신사임당(1504~1551), 허난설헌(1563~1589), 이매창(1573~1610), 황진이(1520~1560) 등은 지덕을 겸비한 탁월한 여성으로 익히 알고 있다. 이에 결코 뒤지지 않은 매력을 지닌 여성이 있는데 바로 담양의 송덕봉(1521~1578)이다. 그녀는 홍주 송씨(洪州 宋氏)인 송준(宋駿, 1477∼1549)과 함안 이씨(咸安 李氏)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송덕봉의 휘는 종개(鍾介), 자는 성중(成仲)이며, 호는 덕봉(德峰)이다.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게 휘·자·호를 모두 가진 인물이다.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은 경사(經史)와 시문에 뛰어난 여성문인으로 ‘덕봉집(德峰集)’이라는 시문집을 남겼다. 여기에는 흔히 유교라고 일컬어지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사대부가의 사회적 가치, 부부간의 도리, 가족애 등이 담긴 그녀의 한시 25수가 담겨 있다. 특히 남편 유희춘과 주고받은 편지는 마치 한편의 멋진 오페라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어느 날 미암이 여자로서 콧대가 센 아내 덕봉에게 이르기를 ‘부인이 문 밖에 나감에 코가 먼저 나가더라(婦人出戶鼻先出)’고 빗대어 놀리자, 이에 덕봉은 ‘남편이 길을 다니매 갓 끈이 땅을 쓸더라(夫君行路櫻掃地)’며 유난히 키가 작은 미암에게 응수했다. 이 짧은 문장에서 조선시대에 주고받았던 내용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여유와 해학이 넘친다. 또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미암은 정원에 핀 꽃을 감상하다가 시(詩) 한 수 적어 아내 덕봉에게 슬며시 건넸다. 시(詩)는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여주다(至樂吟示成仲)라는 제목이다. 뜰의 꽃 흐드러져도 보고 싶지 않고(園花爛漫不須觀)/음악 소리 쟁쟁 울려도 아무 관심 없네(絲竹鏗鏘也等閑)/좋은 술과 어여쁜 자태에도 흥미가 없으니(好酒姸姿無興味)/참으로 맛있는 것은 책속에 있다네(眞腴惟在簡編間). 자신은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며 다른 곳에는 한눈팔지 않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는 시구(詩句)였다. 그것을 읽고 난 아내 덕봉은 미암이 지은 시의 운율을 그대로 빌려서 화답한다. 봄바람 아름다운 경치는 예전부터 보던 것이요(春風佳景古來觀)/달 아래 거문고 타는 것도 한 가지 한가로움이지요(月下彈琴亦一閑)/술 또한 근심을 잊게 하여 마음을 호탕하게 하는데(酒又忘憂情浩浩)/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책에만 빠져 있단 말이요(君何偏癖簡編間). 오히려 남편보다 더 호방하고 유머러스하게 남편의 고지식한 면을 꼬집었다. 어디 그뿐인가? 송덕봉은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어 했으나 조선의 여인으로 태어나 깊은 규방에 갇혀 살아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읊은 자조 섞인 시(詩)도 있다. 천지가 비록 넓다고 하나(天地誰云廣)/깊은 규방에선 그 참모습 보지 못하네(幽閨未見眞)/오늘 아침 반쯤 취하고 보니(今朝因半醉)/사해는 넓어 끝이 없도다(四海闊無津). 그렇다고 불만만 갖고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거나 현실적 역할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송덕봉은 관직과 유배생활 등으로 남편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홀로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송덕봉은 조선 선비의 아내로서 혹은 며느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르고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단순히 당차고 지적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여유와 해학을 잃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보기 드문 진정한 로맨티스트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연계정과 미암일기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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