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생업=전라도 무명, 시전의 명품이 되다.

616
광주 학동에 있었던 제사 공장. 현재 이 자리에 삼익세라믹과 중흥맨션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편집에디터
광주 학동에 있었던 제사 공장. 현재 이 자리에 삼익세라믹과 중흥맨션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편집에디터

목화를 전라도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심다.
과거에 우리의 의류작물로 최고가는 것은 단연 목화(木花)였다. 목화는 ‘목(木)의 꽃’이다. 목은 무명이고, 꽃은 솜이다.

곧 목화는 무명의 원자재인 솜을 만드는 꽃이라는 말이다. 면화(棉花)로도 불리었다. 꽃은 하얀 색이다. 하얀 색은 그에 걸 맞는 이미지를 풍긴다. 그래서 ‘목화 따는 아가씨’라는 노래가 나왔을 것 같다.

목화는 고려 말에 문익점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도입되어, 그의 장인 정천익이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정천익의 아들 문래와 손자 문영이 실 뽑는 법과 옷감 짜는 법을 각각 고안하였다고 한다. 백제 때 유물로 보아 문익점 이전부터 목화가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목화가 재배된 것은 조선초기이다.

목화로 만든 옷감이 무명이다. 무명은 보온과 촉감에 있어서 매우 우수한 의복 재료이다. 이러한 우수한 품질 때문에 무명은 조선초기에 이르러 명주나 삼베를 제치고 대중적 옷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무명은 옷감 외에 화폐와 같은 교환 수단으로, 군포(軍布)와 같은 납세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목화는 전래 즉시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목화 재배지는 처음 재배지 경상도를 떠나 금새 인접 충청도와 전라도는 물론이고, 멀리 북방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그 중 전라도에서 집중적으로 목화가 재배되었다. 15세기 초’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재배지가 가장 많은 곳이 전라도로써 56개 고을 중 27개 고을(48%)이고, 그 다음이 경상도로써 66개 고을 중 13개 고을(20%)이었다.

조선후기에도 전국 목화 생산지는 단연 전라도였다. 생육에 적합한 기후와 지리 조건 때문이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면주(緜州)’라는 무안의 별호가 15세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무안 땅이 목화 재배에 알맞은 곳이어서 사람들이 목화를 널리 재배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하면서 지은 시 속에 “여기저기 모래땅이라 목화 심기에 제 격일세”라고 읊은 바 있다.

목화 잘 자라는 모래 섞인 메마른 밭이 많아 강진 지역에서 목화가 널리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시구이다. 또 옛말에 “장마가 길면 보성 색시가 운다”고 했다.

목화 농사를 많이 짓는 보성 등지에서 늦장마로 목화가 흉작이면 처녀들이 시집을 가는 데 차질이 생겼던 데서 비롯된 말이다(광주시립민속박물관, ‘남도의 길⋅목화의 길’).

또한 19세기 초 전라감사 서유구가 쓴 ‘완영일록’을 보면, “남원과 광주, 옥과는 전라도에서도 목화가 가장 성행하는 곳이다. 이들 고을엔 산이고 들이고 목화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대체로 노령산맥 이남이 우리나라 목화 주산지였다.

일제에 의해 육지면 시험장이 전국에서 최초로 목포에 설치되다.
일제는 1897년에 목포를 개항하고서 본격적으로 전라도 땅에 들어와서 경제 수탈을 감행했다. 수탈 대상 가운데 하나로 목화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 목화를 ‘재래면’ 또는 ‘조선면’이라 하면서, ‘육지면’이라는 새 품종을 반입했다.

1904년에 목포에 최초로 ‘면작시험장'(현재의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목포지점)이 설립되었다. 일제의 권장책에 의해 육지면 재배지가 확산되었다. 1917년 무렵 무안군 밭의 60%가 육지면 재배지였다. 육지면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12년 당시 무안에서 8만근(48톤), 해남에서 6만(36톤)이 생산되었다.

목포에 육지면 재배 시험장이 들어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50호 전후만 사는 한적한 목포가 개항되었던 것도 전라도 지역이 목화의 주요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항 이후 목포 항구를 통해서 목화가 다량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전라도에서 생산된 목화의 80%는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나갔다는 통계도 있다. 요즘의 산업박람회에 해당되는 ‘물산공진회’가 1926년에 목포에서 열렸을 때에 목화가 주요 상품으로 전시되었다.

목포에 목화가 집산됨으로써, 목포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여 솜을 만드는 ‘조면(繰綿) 공장’이 많았다. 그 조면공장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고, 박화성은 그곳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소설 ‘추석 전야’에 담아냈다. 목포에는 목화씨로 기름을 짜는 ‘면유(棉油) 공장’도 많았다. 1926년 목포에서 전개된 면유공 파업은 일제하 노동 운동사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면유 공장 노동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인격적 대우,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을 주장했다(‘전라남도지’).

전라도 무명, 한국 재벌 탄생의 밑천이 되다.
무명은 고문헌에 면포(綿布), 목면(木棉), 백목(白木), 목(木)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한 것은 이 백목에서 유래한다. 고문헌에 ‘포목(布木)’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본래 ‘옷감’이라는 뜻이 아니라 삼베를 지칭하는 ‘포’와 무명을 지칭하는 ‘목’이라는 뜻이다. 목화가 다량 재배되었기 때문에 전라도 곳곳에서 무명을 짰다. 1895년 통계에 의하면, 연간 순천에서 20만필, 나주에서 10만필, 광주에서 7.8만필, 영암에서 6만필을 생산했다. 전국 최대 산지였다.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우수한 품질의 무명이 전라도에서 생산되어 전국에 유통되었다. 정상기가 그린 ‘동국팔도대총도’라는 지도를 보면, 전국 특산물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옷감에 대해 관북의 삼베, 관서의 분주(盆紬), 호남의 강진목(康津木), 영남의 통영목, 한산의 백저, 영천의 황저를 말했다. 강진목이란 ‘강진에서 생산하는 목’이라는 말이다. 강진 외에 나주, 해남, 순천의 무명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한양가’라는 노랫말에 다음 구절이 들어 있다.

白木廛 各色房에 무명이 쌓였어라
康津木, 海南木과 高陽낳이, 江낳이며
商賈木, 軍布木과 貢物木, 巫女布와
天銀이며, 丁銀이며, 西洋木과 西洋紬라.

베廛을 살펴보니 各色 麻布 들어쳤다
農布, 細布, 中山치며 咸興 五升 襑衣布며
六鎭 長布, 安東布와 계추리, 海南布와
倭베, 唐베, 생계추리, 門布, 造布, 永春布며
吉州, 明川 가는 베는 바리 안에 드는 베로다.

서울 시전의 면포를 파는 백목전에서 강진목(康津木)과 해남목(海南木)이 인기 품목이었다. 한 개성상인의 상품 구매 대장에 순천 무명도 들어 있었다.

나주 다시의 샛골에서는 세목(細木)이라 불리는 ‘가는 무명’을 직조하였는데, 품질이 우수하여 고관들의 옷을 만드는데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에 진상으로 올라가기까지 하여 비단보다 값이 더 높았다 한다.

그러다 보니까 집집마다 베틀이 있을 정도로 무명 생산이 성행했다. 자연히 장시에서 무명이 널리 유통되었다. 당연히 전국 상인들이 무명을 사러 전라도에 모여들었다. 예를 들면, 19세기 말기에 포목상을 하던 박승직(두산 창업자)이 강진에 내려와서 무명을 사가지고 가서 큰 돈을 벌었다는 일화가 전하고, 강진 병영의 약국 주인이 공주⋅대구 약령시로 약재를 사러 가면서 돈 대신 무명을 가지고 가서 처분한 후 필요한 것을 사온 적도 있었다.

무명뿐만 아니라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마포(삼베), 저포(모시), 비단도 전국 명품이었다. 앞의 「한양가」에 나오는 ‘해남포(海南布)’는 해남에서 생산되는 삼베라는 말이다. 다른 문헌에 ‘구례포(求禮布)’도 나온다. 삼베는 함경도 6진산이 전국 최고였지만, 전라도산도 명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최항이 교정별감의 이름으로 공문을 보내어 광주의 ‘흰 모시’를 수탈한 적이 있었으니, 광주의 모시가 유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에 모시를 심는 고을이 14군데나 되었다. 요즘은 모시 잎으로 송편을 만들어 ‘모싯잎 송편’이라는 상품으로 전국의 미식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비단 생산을 위한 누에고치,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기념일을 만들다.
비단의 경우 일찍이 백제 때에 비단으로 세금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15세기 자료에 전라도에서 뽕나무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심었다. 호남은 3백(白)이라 하여 쌀, 목화, 누에고치가 유명하다.

비단 산업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순천 항라와 나주 합사주라는 비단이 유명했다. ‘임원경제지’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비단을 잘 짜는 곳으로는 북쪽에 영변⋅성천이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나주 사람들이 두터운 비단을 잘 짜서 값이 일반보다 배나 나갔다. 이 비단을 나주 사람들은 ‘금성주’라고 하였다(‘나주시지’).

사실 일제 강점기 때만 하여도 나주 읍내 이남은 목화를 많이 재배하지만, 그 이북은 뽕나무를 많이 키웠다. 그래서 당시 나주, 광주, 창평, 담양 등 전남 도내 17개소에 ‘잠업전습소’가 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929년 11월 3일은 성진회 창립 3주년이자, 일본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명치절이자,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자축하는 ‘전남산 잠(蠶) 600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누에 생산을 토대로 광주에는 제사 공장이 많았다.

조면 공장도 많았다. 그리하여 광주는 근대 섬유산업 도시로 성장했다. 이런 역사를 뒤로한 채, 해방 이후 나이론에 밀려 무명 소비와 명주 소비가 줄어들자, 전라도의 목화 밭은 고구마나 양파 밭으로 변했고, 뽕밭은 다른 작물로 대체되었다.
옷감이 많이 생산됨에 따라 전라도에는 염직업이 발달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전주에는 염색업에 종사하는 주민호수가 123호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45명이나 고용하는 대형 업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을 이어 나주에 ‘한국천연염색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1926년에 목포에서 열렸던 조선면업공진회 포스터. 일제는 전라도 목화를 수탈해가기 위해 일종의 박람회를 목포에서 개최하였다. 편집에디터
1926년에 목포에서 열렸던 조선면업공진회 포스터. 일제는 전라도 목화를 수탈해가기 위해 일종의 박람회를 목포에서 개최하였다. 편집에디터

목포시 고하도에 조성한 목화재배단지에 목화꽃이 피어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목포시 고하도에 조성한 목화재배단지에 목화꽃이 피어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목화밭의 목화솜.뉴시스 편집에디터
목화밭의 목화솜.뉴시스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