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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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에 가을이 왔다. 김기중 기자 nega@jnilbo.com
소쇄원에 가을이 왔다. 김기중 기자 nega@jnilbo.com

◆소쇄원에 가을이 왔다.
지난여름 유례없는 혹독한 무더위를 겪은 탓인지 서서히 가을본색을 드러내는 주변풍경들이 어느 때보다 더 반갑고 정겹게 느껴진다. 매년 만나게 되는 가을풍경이지만 그때마다 받는 느낌은 조금씩 다르다.

파스텔 톤 봄의 향연을 시작으로 생동감 넘치는 강렬한 녹색잔치를 벌였던 여름을 지나 탐스럽게 농익은 가을풍경에 이르기까지 그저 색채변화를 통해 주는 감동 하나만으로도 자연은 충분히 고맙다.

가을풍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지난여름의 무더위쯤은 순식간에 잊히고 만다. 특히 자연 속에서 누군가의 흥미로운 사연을 접하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들을 느끼며 뭔가 미래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장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별서정원이 아닐까.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이런 장소들을 즐겨 찾는다. 그 이유는 도시정원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자연미와 전통미, 그리고 알 수 없는 신비스러움이 가슴 벅차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을 조성한 사람이나 다녀간 수많은 선인들이 남겼던 흔적과 이야기들을 통해 많은 감동과 교훈을 덤으로 얻는다. 아주 옛날 선인들의 탁월한 안목에 의해 들어선 누정과 그곳에서 조망되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언제 보아도 참 각별하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이지만 특히 소쇄원의 가을은 매번 설렘으로 맞이하게 된다.

소쇄원은 봄도 좋고 여름도 좋다. 하지만 가을풍경은 그 깊이가 사뭇 다르다. 사람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풍경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울긋불긋한 단풍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코끝에 전해지는 상큼한 공기와 살갗을 스치는 기분 좋은 미풍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한층 또렷해진 계곡 물소리까지도 가을을 더욱 정겹게 한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대숲은 소쇄원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자연스럽게 길을 내어준다. 댓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상쾌하게 귀를 씻어주고 빽빽한 잎들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은 어느새 온기가 되어 몸속으로 전해진다.

가장 처음 만나는 풍경은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대봉대(待鳳臺)이다. 별다른 문이 달려 있지 않은 담장 곁에 소박한 표정으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봉황을 기다리다’라는 뜻을 가진 대봉대는 소쇄원을 찾는 손님들을 맞는 첫 대면장소인 셈이다. 이곳 별서정원 백미 중의 하나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명패가 길게 걸려 있는 고색창연한 흙돌담장이다. 이 담장은 소쇄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아트갤러리라고 할 수 있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생긴 돌담의 색깔과 질감의 미묘한 변화(Gradation)는 소쇄원의 고즈넉함을 담당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관찰해보면 돌담에 붙어 있는 이끼를 시작으로 작은 식물들이 담 자락에 기대어 자라고 있다.

담장은 그 자체가 수직정원이고 상설 전시작품이다. 담장에는 세 개의 멋진 서예작품이 걸려있다.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고 새겨진 글귀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애양단은 겨울철 북풍을 막기 위해 세운 단(壇)으로 대봉대 바로 옆에 위치한다. 애양단의 햇볕과 동백나무는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 있어 양산보의 효심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소쇄원 조성 당시 암울했던 시기에 바람은 막아주고 햇살은 듬뿍 받게 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맛보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 같다.

이 작은 담장 하나를 통해 따뜻한 남도의 정(情)을 표현하고 나아가 한층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또 하나는 오곡문(五曲門)이다. 이 곳은 내원(內園) 북동쪽 담장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문(門)은 없다. 다만 사람들이 드나드는 주요 입구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오곡은 남송(南宋) 때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가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등을 읊었던 곳이다.

오곡은 구곡가운데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오곡문은 소쇄원의 가장 상징적인 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통로는 사람들만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거침없이 흐르는 계곡물, 그리고 바람, 생물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담장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을 보라. 물은 자연스럽게 오곡문 아래를 통과하여 절묘하게 폭포로 떨어지고 그 폭포에서 부서지는 물보라와 청아한 낙수(落水)소리는 선비들에게 영감을 주어 멋진 시화(詩畵)로 거듭나게 하지 않았던가.

만약 계곡물을 다른 곳으로 돌렸거나 막았다면 이 정원은 절반 이상의 가치를 잃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양산보는 자연과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더불어 행복한 세상, 그런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오곡문을 지나 위쪽을 올려다보면 기와를 씌운 흙돌담벽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소쇄처사양공지려’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문에 걸려 있는 명패 같은 것으로 ‘려(廬)’는 ‘오두막’이나 ‘초막’을 가리킨다. 소쇄(瀟灑)가 양산보(梁山甫, 1503년~1557년)의 호(號)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소쇄공의 소박한 쉼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원래 입구에서부터 애양단에 이르는 기다란 담장에는 김인후((金麟厚, 1510년~1560년)가 1548년에 지은 48영이 새겨진 목판이 박혀 있었으나 한 때 담장이 유실되는 일을 겪으면서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대신 ‘소쇄원48영(瀟灑園四八詠)’은 제월당 내부에 걸려 있는 두 개의 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월당(霽月堂)은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사색하는 공간이었다면 광풍각은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시를 짓는 교류와 창작의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에 걸려 있는 여러 현판 등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소쇄원은 호남사림문화를 이끈 한 축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이상과 현실을 허심탄회하게 논하며 소통했던 곳이다. 소쇄원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마치 한 도시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미래도시가 어떻게 계획되고 디자인 되어야하는지 그 혜안을 제시하고 있다. 커뮤니티, 예술, 문학, 생태, 경관 등 종합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최상의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소쇄원의 가을풍경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풀 한포기까지 다 의미가 있다. 소쇄원 가을풍경은 잠시나마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다. 삶의 지혜와 너그러움을 배우게 하고, 자연과 예술과 교감하게 하며,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마땅히 지향해야할 삶의 가치와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올해도 소쇄원에 어김없이 또 가을이 왔다.

◆소쇄원에서 풍경 감상법을 배우다.
소쇄원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건물, 담장, 계곡, 식물 등 다양한 경관요소들이 함축적으로 조화롭게 들어서 있는 곳이다. 그런 면에서 풍경감상법을 제대로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풍경(風景)은 영어로 ‘Scenery(씨너리)’인데, 이 단어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용하는 ‘Scene(場面)’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극장을 ‘Theatron(테아트론)’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Theatre(극장)의 어원이다. 또 ‘Skene(스케네)’는 원래 고대 그리스 배우들이 가면이나 의상을 갈아입거나 대사를 연습하는 곳이었는데 나중에 무대배경이 된 공연장 뒤에 있는 건물을 말한다. 여기에서 Scene(씬)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장면이 연속적으로 나오면 그것을 Sequence(시퀀스)라고 한다. 이 무대의 ‘Scene(장면)’에서 ‘Scenery(풍경)’라는 단어가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풍경은 무한대로 펼쳐진 자연에서 자신의 의지 혹은 풍경조건에 따라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일정한 장면(場面)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생각은 한자문화권의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풍경의 경(景)은 극이나 스케치 등에서 장면을 세는 단위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풍경을 일정단위로 구분하여 감상하게 된 것은 지역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기 위한 팔경문화(八景文化)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실 팔경은 중국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의 8대 경관인 소상팔경에서 유래하고 있다.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남쪽의 소수와 상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대표적인 경치를 말한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대한팔경, 관동팔경 등 지역의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시화(詩畵)로 표현하면서 팔경문화가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단순히 팔경에 그치지 않고 독창적으로 풍경을 보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에 대해 관심을 갖고 되었고, 예전보다 폭넓게 의미부여하며 실제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소쇄원 48영은 풍경감상법의 진수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제월당이나 광풍각에 잠시 걸터앉아 풍경을 감상하면서 정원을 찾은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참 흥미롭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사색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거닐면서 요리조리 살펴가며 감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저 동네 유원지처럼 편하게 이용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고, 뭐 그리 바쁜지 그저 인증 샷만 남긴 채 휘익 둘러보고 떠나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사실 어떻게 이용하든 개인의 취향에 따라 감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풍경과 정원이 주는 참맛을 느끼려면 평소보다는 귀 기울이고 눈여겨보려는 약간의 여유와 진지함은 필요하다. 북쪽 장원봉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따라 정자, 담장, 화계(花階), 연지(蓮池) 등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성한 소쇄원은 자연 경관미를 극대화하려 했던 조선시대 자연관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별서정원이다.

소쇄원은 원경, 중경, 근경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그러나 소쇄원의 풍경은 그게 다가 아니다. 풍경 곳곳에 충(忠), 효(孝), 애(愛), 정(情)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조그마한 별서정원에서 시대적 애환을 읽고 세월의 흔적을 느끼며 소소한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잠시나마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소쇄원은 단순히 풍경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시대적 정서(情緖)와 남도의 따뜻한 정(情)을 듬뿍 담고 있는’정경(情景)’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소쇄원에 들러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나만의 정경(情景) 하나쯤 찾아 재미를 만끽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소쇄원에 가을이 왔다. 김기중 기자 nega@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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