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忠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광주 충장사.충장공 김덕령-백옥연의 문향, 가다가 멈추는 곳 楓巖… 단풍 짙어지면 흐르는 물도 물드는 곳 은둔의 정자, 풍암정 임란중 나라 위해 일어난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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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인(天地人), 무등산 꼭대기 세 개의 봉우리에서 시작된 단풍이 느린 걸음으로 하산하고 있다. 단풍은 서석대 입석대 광석대의 현묘한 주상절리를 휘돌아 규봉암에서 며칠 머물고는 내려온다. 능선을 타고 흐르면서 장불재에 이르러 억새와 어우러지는 풍경은 가히 천상의 그것이라 할 만하다. 저렇게 수직으로 솟아오른 돌기둥은 아득한 옛날, 그러니까 7만년 전 중생대, 이 땅을 주름잡던 공룡의 등뼈처럼 보인다. 단풍은 그것이 무너져 내려 돌의 강을 이룬 너덜을 지나 원효스님처럼, 신라의 원효계곡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 찬란한 물결들,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 산에 오르고, 단풍은 생을 마치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하나는 오르고 하나는 내려와, 둘이 만나니, 무등산 역사길이 적당하다. 의병장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는 충장사(忠壯祠)에서 시작해 원효계곡을 따라 충효마을을 돌고 환벽당과 취가정으로 가는 길. 그 길의 초입은 동네 뒷산처럼 편안하다. 그것은 그저 도란도란 얘기하며 편하게 걷는 오솔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길이다. 나라를 위해 전쟁의 불꽃으로 사그라진 호남 의병들의 장엄하고 슬픈 사연과,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용기와 의로움으로 의향 광주를 이끈 조선 선비의 문향(文香)과 무용(武勇)이 담긴 길이다.

충장사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7~1596)을 기리는 사당이다. 1670년부터 벽진서원에 배향돼 오다 서원철페령 이후 1975년 지금 이 자리에 건립되었다. 정조가 내려준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따라 ‘충장사’라 했다. 충장로는 김덕령의 시호를 따른 것이다. 김덕령은 무등산 아래 석저촌에서 아버지 김붕섭과 어머니 남평반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92년 임진왜란, 조선건국 200년 만이다. 개전 20일 만에 한양에 입성한 왜군은 온 국토를 휩쓸고, 끝까지 항거한 호남을 향해 마지막 칼끝을 겨눈다. 왕은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주했고, 무능한 조정은 무너졌다. 군은 허울뿐, 추풍의 낙엽처럼 흩어지고 스러졌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무너진 자리에 다시 일어나는 ‘의인(義人)’들이 살아 있었다. 봉록도 받지 않고, 의무도 없었으나, 오직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나 삶을 불꽃처럼 태워버린 사람들, 그 이름 의병(義兵)이다.

경상도의 홍의장군 곽재우도 의병을 일으켰다. 막대한 재산을 의병부대에 내놓고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가 왜군을 섬멸했다. 그러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공훈은 고사하고 그들의 자리를 흔들고 생명까지 위협했던 것은 조정과 임금이었다. 누란지위의 순간에 공이 많고 명성이 높을수록 죽음과 가까웠으니, 그것이 조선의 비극이다. 곡성의 선비 유팽로, 마상격문으로 조선을 울리고 호남을 울린 환갑 나이의 의병장 제봉 고경명, 나주 창의사 김천일 등 선비로부터 무명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나를 버리고 오직 나라를 위해 의(義)를 세운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었다. 임금은 화려한 수사(修辭)로 넘쳐난 장계를 내리며 그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새로운 의병장을 추천하라 명했다.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의 명령을 받았다. 김덕령은 갈등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고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형 덕홍의 복수를 위해서도 목숨은 아깝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삼년상 중이라 효를 굽혀 충을 실행하기 쉽지 않았다. 자식의 도리와 신하의 도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나라가 사라지면 어버이도 없는 것이니 이 또한 효를 어기는 것이다. 미약한 손에 마땅히 칼을 잡겠노라’하며 먹물들인 상복을 입고 전장을 향했다.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1594년 선조로부터 충용군이라는 군호를 받는다. 선조는 김덕령을 조선의병 총수로 삼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김덕령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6차례의 엄형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을 남기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옥사(獄死)했다. 그의 충(忠)에 대한 보답은 살(殺)이었다.

봄 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불 붙는다. 저 산에 일어난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이 몸에 연기도 없는 불은 끌 물이 없음을 한탄하노라. 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김덕령

여름날 충장사에는 백일홍이 유난히 붉은 핏빛으로 피어난다. 백일홍 지니 빨간 단풍이 ‘추산화연곡’을 대신한다. 큰 뜻을 품었으나 못 다 핀 꽃으로 스러져간 김덕령. 임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의병이 두려웠던 선조는 김덕령을 역적으로 몰았다.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는 정유재란 때 왜군을 피해 담양 추월산 보리암에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아들 김광옥은 외삼촌이 있는 전북 용안 마을로 가 신분을 감춘 채 살았으며 이때부터 본관을 용안김씨로 하고 이후 함경도로 옮겨갔다. 하여 김덕령은 용안김씨의 시조도 된다. 1337년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에서 영국군은 항구도시 칼레를 공격했고 칼레의 시민들은 11개월을 버티다 항복했다. 항복 조건으로 영국 왕은 칼레의 시민 중 여섯 명의 대표가 밧줄을 메고 걸어 나와 교수형을 당할 것을 강요했다. 항복 조건을 듣고 시민들이 절망하는 순간 그 시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외스타슈 생 피에르가 나서서 죽기를 자원했다. 이어서 시장과 법률가 등 지도층 인사 등 일곱 명이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다음날 아침에 광장에 일찍 나오는 여섯 명이 영국 왕 앞에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 중 한명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결심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미리 자결하고, 여섯 명의 시민은 주저함이 없이 밧줄을 걸고 영국 왕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영국의 왕비는 그들의 영웅적 태도에 감명을 받았고 그때 왕비는 임신 중이었으므로 뱃속의 아기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왕비의 청을 들어주어 사형집행을 취소했다. 이 감동적인 실화는 500여년이 지난 1889년 조각가 로댕에 의해 조각 작품으로 탄생했는데 그것이 ‘칼레의 시민’이다.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준다. 역사상 의로운 행동을 보여준 사례는 많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당당하게 죽음을 무릅쓴 여섯 시민의 행동은 용기와 의로움의 실천이었다. 더욱이 지도층 인사인 그들이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기에 더 큰 감동을 준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 5백년 영화의 비결을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찾는다. 로마가 그토록 광대한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희생되어 갔다. 로마의 귀족들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무를 철저하게 지켰다. 전쟁의 맨 앞에 서는 것은 당연했고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그들의 자기희생은 백성에게도 이어졌고 로마는 500년을 지속했다. ‘칼레의 시민’도 사회지도층으로서 솔선수범하여 자기희생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의병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의병의 지도자는 조선의 귀족인 선비집단이었고 손발이 되어 함께 한 이들은 이름 없는 일반 백성이었다.

가을은 깊어가고, 천지는 만산홍엽이다. 무등산 역사길, 바람따라 낙엽이 쓸려 다니고 있다. 그 길을 걸으며 조선의, 이 땅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생각한다. 효(孝)를 굽혀 충(忠)을 펴고, 가진 만큼 나누고 누린 만큼 베푼, 가진 것과 목숨을 내놓으며, 명문가의 집안에서 자식까지 앞세워 전쟁터로 먼저 나갔던 조선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길, 광주가 의향으로 불리는 그 뿌리가 바로 이 길이다.

충효동 분청사기전시실을 지나 단풍 우거진 길을 걸으면 왼쪽엔 다랑이논의 유려한 곡선 안에 황금빛 벼들이 찬란하고, 풍암제를 지나면 나무에 가려 살짝 드러난 지붕의 처마나루, 원효계곡을 건너게 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풍암정(사진). 대부분 정자는 안에서 밖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풍암정은 밖에서 바라보는 정자이다.

풍암정은 먹색 수묵화이고 문향(文香)이 풍기는 곳, 가다가 멈추는 곳이다. 노송과 오래된 나무들, 커다란 바위, 그리고 물소리, 뒤는 산으로 막혀있고 앞은 멀리 트여있다. 단풍이 짙어 붉어지면 흐르는 물도 단풍에 물든다. 실제로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쓴 ‘풍암기’에는 주변에 100여 그루의 단풍나무가 정자를 에워싸고 흐르는 계곡물까지 붉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풍암정이 지어진 연대는 1614년으로 되어 있으나,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지어졌고 김덕보가 이곳에 칩거한 것은 임진왜란 뒤인 것으로 보인다. ‘김충장공유사’에는 1602년에 건립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맏형 김덕홍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서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둘째 형 김덕령도 전국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큰 공을 세웠지만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형의 주검을 수레에 싣고 무등산 자락에 묻은 김덕보(金德普.1571~1627)는 세상과 담을 쌓고 원효계곡에 정자를 짓고 세상을 잊고자 호를 ‘풍암(楓巖)’이라고 했다. 두 형을 잃고 난 후 세상에 대한 뜻을 아예 접고 두문불출하고 무등산 주변의 사림들과 교유하면서 후진들을 교육하다 정묘호란 때 안방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으로 거동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광주 광산구 문화재활용팀장

광산구 역사문화 전문위원

백옥연의 문향, 가다가 멈추는 곳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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