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보다 무덤 초라하지만 그는 꿈꿨다, 마한의 부활을

定道 천년 전라도의 재발견 한민족 역사 정통성 계승하려 한 견훤의 염원 야사에는 외가가 광주 북촌 통일신라 말기 부패와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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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개창한 견훤(甄萱.867~936)처럼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인물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후삼국이 정립된 시기에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견훤의 탄생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먼저 삼국사기를 보면, 그는 이(李)씨의 성을 가진 상주 가은현(加恩縣.문경) 출신의 아자개의 아들로서 변방에 근무하다 고위 군관으로 성장하여 일군의 세력을 형성한 인물로 나중에 견(甄)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야사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유사에 광주 북촌에 거주하는 어느 부잣집에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이라는 인물을 낳았다는 것으로 우리 지역 출신의 비범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독특한 출생담을 가진 견훤은 불굴 정진하여 마침내 독자적인 군사력을 형성하니 그를 따르는 젊은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892년 무진주(武珍州.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아울러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2000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 開國公食邑二千戶)’라는 매우 기다란 호칭의 벼슬을 자신에게 스스로 수여하였으며, 900년에는 완산주(完山州)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 되었다.

그는 강인한 전투력으로 신라 강역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면서 927년에는 경주로 진격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실 가문의 동생인 김부(金傅)를 경순왕으로 내세웠다. 이 비보를 듣고 군사적 지원을 위해 출동한 왕건도 팔공산(八公山) 싸움에서 크게 패하였으며, 신숭겸의 충직한 희생 덕분에 구사일생하였다. 그러나 929년 벌어진 안동 전투에서 왕건의 고려 군대에 크게 패배하면서부터 내리막이 시작됐다.

노쇠해진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승계하려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남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에 귀부하였고, 백관(百官)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벼슬과 양주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후 후백제는 내분으로 왕건에 의해 멸망하였고, 견훤 또한 불우한 처지와 울분의 나날 속에 병환을 얻어 논산 개태사의 한적한 절간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새 시대를 열망한 진정한 영웅

견훤은 부패하고 혼란상이 극에 달한 통일신라 말기의 시대적 모순을 목격하고 이를 극복하여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거대한 야망으로 후백제의 건설을 꾀하였다. 큰 과업의 성취를 위한 실천적 과제로 새로운 건국이념인 마한-백제계승론이라는 선제적인 핵심의제를 제시하여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역사계승론이 통일신라 말기에 대두된 것은 사회적 혼란기에 대의명분과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옛 백제지역에서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것으로 견훤이 이를 건국이념으로 설정함으로써 옛 백제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 계승론은 왕건에게도 영향을 미쳐 고구려 계승론을 대두하게 하였다. 역사계승론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게된 것은 삼국통일 이후 나타난 ‘일통 삼한(一統三韓)’ 즉 삼한이 하나의 국가로 융합되었다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시대적 과업으로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대통합의 시대를 열어보자는 일종의 소명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견훤은 삼한통합의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한편, 삼한과 삼국과의 관계는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한-가야 계승론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삼한 가운데 단군과 기자조선을 계승하는 국가는 오로지 마한(馬韓) 뿐이라는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이 주창한 ‘마한정통론’이 오늘날까지 대세를 이루어 내려오고 있다.

전국 견훤설화- 민중염원의 결정체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는 견훤의 탄생과 성장, 죽음 등에 대한 다양한 민간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대다수가 견훤이 신이한 존재임을 부각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일부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날개가 꺾인 영웅’이라는 결과론에 입각하여 신성함이 격하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먼저 견훤의 탄생지에 관한 설은 2개가 존재한다. 삼국사기에 상주 출신이라 하였는데, 본래 그의 가계는 광주 사람이었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 상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으며, 삼국유사의 설화 내용처럼 광주출생이라는 사실이 실제와 부합할 수도 있다. 견훤이 지렁이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이 현재적 시점에서는 한미한 출생 배경으로 보여지기도 하나, 사실은 고귀하고 비범한 출생의 의미를 지닌다. ‘지렁이’의 유래는 지룡(地龍) 즉 ‘땅 속에서 사는 용’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고, 달리 토룡(土龍)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두 용을 신성한 존재로 숭배하는 ‘용사(龍蛇)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견훤이 만일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면 ‘지렁이’라는 용어가 ‘용’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형적인 야래자(夜來者) 전설에서 그의 영웅적 특권과 동시에 기구한 운명도 엿보게 된다. 정읍에서는 견훤의 어머니가 들판으로 일하러 간 사이 풀밭에 누워 있는 견훤에게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광주 북구 생룡동 소재의 죽취봉(竹翠峯)은 별칭으로 견훤대(甄萱臺)라 부른다. 광주 북촌에서 태어난 견훤이 이곳에 와서 활과 화살을 쏘며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는 오랜 구전이 남아있다.

경북 안동에서는 견훤의 죽음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 왕건의 군사는 견훤의 군대와 벌인 고창전투에서 풍전등화의 위기를 지역 호족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등 삼태사(三太師)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들은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견훤을 거대한 나무수레를 이용하여 낙동강에 밀어 넣는다. 낙동강 물에 수십 가마의 소금을 풀어 넣고 견훤을 그 안에 빠뜨리니 지렁이로 변신하여 무참히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규모의 집단 유희로 광주의 고싸움놀이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안동의 차전(車戰)놀이가 견훤과 왕건의 고창전투에서 비롯되었다는 안타깝고 서글픈 유래가 있다.

이처럼 대변혁기의 불세출의 영웅 견훤은 때로는 신성한 존재로 때로는 신성성을 상실한 평범한 존재 양태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마한과 백제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었지만, 가족 간의 불화와 시대적 운세의 부족으로 원대한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전주가 바라보이는 논산 연무읍 금곡리 양지바른 산자락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견훤이 그토록 염원하였던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역민들의 정신개벽이 한시바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형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흉년 없도록 물 가둬라… 견훤이 쌓았다는 광주 경양방죽

건국 기반 강화 목적… 당진 합덕제.고부 눌제 축조설도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한 역사적 인물임에도 주인공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다. 최근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기존의 역사서술에서는 견훤은 여전히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왕건은 긍적인 반면에 견훤은 부정적인 역사서술이 많다. 왕건에게 멸망 당한 것도 서러운데 천년 이상을 건너뛴 후예들한테 칭찬을 받지 못할 지언정 나쁜 인물로 치부 당하는 것은 더욱 억울할 것이다.

견훤은 마한과 백제의 고토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왕국의 부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저수지를 신축하거나 개축하거나 하여 농업생산력을 높혀나아갔다, 저수지의 신축이나 개축에 관련된 견훤 설화는 광주전남에서도 전북에서도 충남에서도 충북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경양방죽에 관련된 견훤 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견훤 어머니의 경양방죽 축조 전설이 그것이다. 후백제왕 견훤의 어머니가 광주의 부자로서 북촌에서 살았는데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기 직전인 신라 진성여왕 때 극심한 흉년을 맞아 광주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관개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경양방죽을 만들었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경양방죽와 같은 저수지의 축조와 관련된 견훤 전설은 경양방죽에도 나올 뿐 아니라 당진의 합덕제와 고부의 눌제 축조에도 나오고 있다. 견훤의 탄생지를 둘러싸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술내용이 엇갈리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저수지 관련 견훤 전설은 경양방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합덕제와 눌제와 같은 저수지의 축조에도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견훤은 사회경제적 피폐를 시정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건국기반을 쌓기 위해서 저수지 축조나 개축, 보수를 추진했을 것이다. 광주에서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후백제의 영토팽창을 전개하는데는 이러한 저수지 축조나 개축, 보수가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견훤은 농업생산력 제고를 통해 건국기반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워가기 위해 경양방죽을 축조하고 당진의 합덕제와 고부의 눌제를 축조하였을 것이며 나아가 다른 저수지를 개축하거나 보수하도록 조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라도 견훤과 관련된 저수지 설화를 이제 제대로 조사하여 연구하는 게 필요하다. 후백제의 건국기반 강화, 국력강화, 민심수습을 위한 건국 지도자 다운 견훤의 면모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한과 백제를 잇는 정통성을 계승하고 홍익인간을 구현하고자 했던 광주전남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오늘날 크게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경양방죽의 복원은 광주전남의 역사적 대표인물 견훤의 리더십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으로 믿는다.

조성식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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