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아래서 물었다 忠인가 孝인가, 무엇이 우선인가

백옥연의 문향 가다가 멈추는 곳 광주 무양서원- 금남 최부 예리한 관찰력 번뜩 세계 3대 중국기행문

76

선비 최부(崔溥)는 제주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일했다. 이 벼슬은 도망간 노비를 추달하거나, 범죄수사를 담당하던 그 시대의 경찰이었다.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상을 당했다. 한시바삐 고향인 나주로 돌아가야 한다. 기상이 어지럽다고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나 선비가 한낱 날씨에 굴할 것인가. 만류를 뒤로하고 최부는 출항한다.

때는 한겨울, 북서계절풍이 몰아치고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너울은 사납다. 43명을 태우고 제주 별도포를 떠난 배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 추자도 앞바다에서 표류한다. 배는 갈 길을 잃고 해류를 따라 14일을 헤맸다. 죽음과 맞선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중국 절강성 우두외양. 말할 수 없는 시련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착했으나 그들은 왜구로 오인 받아 또다시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런 고난 속에서 최부의 리더십은 빛난다. 그들은 조선 관리로 인정받아 항주로 이송된다. 중국 강남에서 대운하를 따라 북을 종주하고 북경과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기까지 6개월 8000리의 대장정. 그것은 조선 최초의 것이었으며, 장준하의 ‘장정’보다 더 극적인 것이었다. 최부는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일행 43명 전원의 목숨을 살려 조선으로 귀향한다.

최부는 귀국 즉시 망부(亡父)의 땅, 나주로 달려가야 하나, 지엄한 임금의 명이 떨어진다. 148일간의 중국 표류기를 글로 지어 올리라는 분부다. 마음은 나주에 있으나 몸은 한양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남대문 밖 청파역에 머물며 8일 동안 글을 짓는다. ‘중조문견일기-표해록’, 뛰어난 기억력과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의 풍습과 언어와 문화를 기록한 15세기 중국 기행의 3대 명저는 이렇게 탄생된다.

그러나 이 일은 충(忠)이 먼저인가, 효(孝)가 먼저인가라는 고루한 논쟁을 촉발시키며, 훗날 최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최부는 책을 저술한 뒤에 뒤늦은 상을 치르고, 1년 뒤 모친상에 이어진 4년의 복상을 마치고 돌아온다. 성종은 그에게 사헌부 지평을 임명한다. 그러나 사간원의 반대가 극심하다. 한 달 넘게 임금의 교지에 대한 서경을 반대하고 있다. 부친상의 와중에 중국 표류의 긴 여정에서 시(詩)를 많이 지었다는 것과 표류 여정을 기록하라는 어명을 받고 분상을 미뤘으며, 기록을 하는 동안 조신들을 맞아 의견을 대담을 나눴다는 것이 예(禮)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충은 효와 부딪친다. 왕명에 따르는 것은 충(忠)이요, 즉시 분상하는 것은 효(孝)라 할 것이다. 최부는 중국 체류 동안 한 번도 상복과 상건을 벗지 않았다. 황제와의 대면에서도 예를 지키기 위해 상복을 고집했을 정도로 성리학의 예학이념에 충실했다. 조선 관리로서의 예와 기개도 잊지 않았다. 개인으로서의 선비보다 일국의 관리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마음가짐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은 환공을 도와 사상 첫 패업을 이룬 인물이다. 여기에는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나눈 포숙아의 헌신적인 도움이 컸다. 관포지교(管鮑之交)는 거기서 나왔다.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제양공의 이복동생인 공자 규와 소백의 스승이었다. 두 공자의 권력투쟁에서 규가 패하자 그를 따르던 소홀은 주군을 좇아 자결한다. 하지만 관중은 살아남아 포숙아의 추천으로 제 환공을 도와 최고의 관직에 오른다.

공자는 주군인 규를 등지고 제 환공을 도운 ‘관중의 행위’는 사람에 대한 사소한 약속, ‘량(諒)’이라고 지적한다. 반대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참된 약속은 ‘신(信)’이라 하며, 관중이 천하를 바로 잡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중원의 역사와 문화를 수호한 점을 들어 관중을 ‘문화 영웅’이라고 까지 칭한다. 여기서 제자 자로가 묻는다. 주군에게 충성 맹세를 어겼으니 관중은 배신자가 아닌가요? 관중은 배신자인가? 아니면 한낱 필부의 작은 절개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대의의 정치가로 보아야 하는가? 저마다 관점에 따라 다른 판단이 있을 것이다.

관중의 문제는 최부의 논쟁과 무관치 않으니, 망부 분상이 먼저인가, 임금 어명이 먼저인가는 ‘량(諒)’과 ‘신(信)’ 사이에서, 혹은 사익과 공익의 사이에서, 깊이 되새겨 봄직한 일이다.

선비 최부. 단종 2년 나주 곡강면(현 동강면) 성지촌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표해록’으로 조선 선비의 문장을 떨친 최부는 조선 사림의 종주였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제자였으며 한훤당 김굉필, 탁영 김일손, 일두 정여창 등과 동문수학하였고 관직에 있는 동안 그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성종 13년(148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경전에 조예가 깊고 문장에 능해 성종 조에 주로 문한직에 있었다. 서거정(1420~1488) 등과 함께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까지 중요한 사실, 사건, 인물들을 뽑아 ‘동국통감’을 편찬했는데 총 382편 중 120편을 최부가 지었으며 동국여지승람, 성종실록에도 관여한 문재(文才)였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무양서원은 장경공 최사전을 주벽으로 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배향하고 있다. 1921년 동경제국대학박물관으로부터 반화받은 ‘최사전묘지명’을 보관하고, 이에 대한 제향을 위해 1927년 건립되었다. 특이한 것은 서원이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립교육 시설답게 탐진 최씨 문중은 1945년 무양중학교(현재 비아중학교)를 설립하여 지금도 교육의 길을 잇고 있다.

최영무(85세) 무양서원 관리위원장은 “광산구에서 ‘선비에게 길을 묻다’ 인문학 강의, 표해록을 바탕으로 한 중고생 프로그램 ‘여정14436’, ‘선비의 다락(多樂)’, ‘선비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옛 선비정신을 전수해주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면서 “도심 속에 자리해 많은 사람들이 찾으니, 해설사가 매일 상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복상과 표해록 짓는 일로 충과 효의 논쟁의 중심에 섰지만 최부는 왕도와 민본을 추구하는 신념의 선비로서 성종의 신임 아래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등 관직을 두루 역임한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최부는 바다의 폭풍보다 더 살벌한 정치적 폭풍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사간원 사간이 된 최부는 목숨을 걸고 간쟁을 하였고 급기야 연산군 2년 폐정이 드러나자 임금의 행동에 대해 거침없는 논박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편으로 왕명에 따라 수차를 만들어 농가에 보급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선비이자 신하로서 본분과 원칙에 벗어나는 일이 없이 행동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6년 후인 더 큰 비극이 찾아오니 연산군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참형되었다. 향년 51세. 2년 뒤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다. 이는 15세기 후반 사림 형성의 주축에 있었던 인물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는 한때 정체와 후퇴는 있으나 최부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 있어 바르게 나아간다는 생각이 서원을 나오면서 든다. 비 그친 가을날, 그를 기리는 무양서원에는 무진지양, 광주 정신의 볕이 들고, 선비 나무라 할 배롱나무 꽃이 지고, 탈각을 하고 있었다. 작은 의로움 보다 공동체의 선비정신을 우선했던 그의 삶은 500년이 지난 지금, 호남 사림의 정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최부 ‘표해록’

‘표해록’은 금남 최부가 성종19년 윤1월 1일부터(1~2일 준비, 3일 출항), 6월 4일 밤중 의주에 도착하기까지 여정을 다룬 표류기행문이다. 귀국하자마자 왕명에 의해 단 8일 만에 148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표해록’(원제목 ‘중조문견일기’) 세 권을 남긴다.

절박한 상황에 쫓기듯 지은 글임에도 박학다식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예리한 관찰력과 판단력, 뛰어난 기억력으로 강남을 견문한 내용이 유려하게 드러난다. 당시 미지의 공간이었던 강남의 풍습, 언어, 문화, 역사 지리서로 조선 사대부, 나아가 일본에까지 중국 남방 지역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책으로 각광을 받았다.

표해록은 단순한 표류기가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에 의해 쓰여 진 15세기 중국견문록이며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뚜렷한 역사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지니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의 사대부들과 당당하게 교유하였으며 무엇보다 최부는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유교의 가치관을 가감 없이 보여준 조선의 선비였다.

‘표해록’을 중국에 처음 소개한 북경대학의 갈진가 교수는 일본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최부의 ‘표해록’을 세계 3대 중국기행기라고 한다.

광주 광산구 문화재활용팀장

광산구 역사문화 전문위원

백옥연의 문향 가다가 멈추는 곳

[email protected]